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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한번으로 을을 자처한다.

참을 '인'자를 새기는 날들.

by 주다

이상한 소리에 눈이 떠졌다. 시계를 보니 새벽 1시. 벅벅벅. 무슨 소리지. 거실 쪽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벅벅벅. 아무리 생각해도 피부를 긁는 소리다. 그럼 범인은 가을이겠다. 온도, 습도가 맞지 않으면 긁어대고 금방 부어오르는 피부 덕에 여름내 고생 중인 아이. 피부약이 떨어져 내일 오후에는 병원에 가자라고 했는데. 염증 수치가 많이 높아진 걸까. 밤새 긁어댈 모양이다. 일어나서 가볼까. 줄 약도 없는데. 피곤해서 일어나기 싫다. 벅벅벅. 톱질 소리 마냥 긁는 소리가 신경을 자극하기 시작한다. 그래, 피곤해도 일어나 살펴보기라도 해야지.

모른척할까 했지만 소리에 꽂힌 지금, 해결하지 않으면 잠자기는 글렀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연고를 찾는다. 최소한으로 내가 해줄 수 있는 일. 어두운 거실, 누가 깰세라 고양이처럼 발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연고를 찾아 나선다. 어디에 뒀더라? 잠결이라 바로 생각나지 않는다. 여기저기를 뒤지면 누군가는 잠에서 깰 것이기 때문에 안전한 방법을 생각한다. 끝 방에 연고 새것 있었지. “찾았다.” 가을이에게 조심스레 다가간다. “많이 간지러워? 연고 발라줄게, 내일 아침에 병원 바로 가자.” 연고를 발라주고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내일 병원 갔다가 하루 쉬게 할까. 밤잠 설치면 하루가 피곤한데. 열심히 안 한다고 소리치던 몇 시간 전의 엄마는 사라지고 아이의 컨디션에 안절부절못하는 엄마로 변신한다. 아이에게 아픈 곳이 생기거나 하면 돌연 엄마 마음은 나약해진다. 그래 학교나 공부가 무슨 소용이야, 안 아픈 게 최고지.


평소에도 이런 생각으로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나는 자꾸만 잊어버리는 엄마. 아파야만 이런 마음을 겨우 생각해 낸다. 요즘 가을이와 사이가 데면데면했다. 사춘기는 아직 아닌 것 같은데. 대답을 잘 안 하고 말투가 공격적이다. 이해해 보려 하지만 사춘기가 무슨 벼슬도 아니고 버릇없는 행동들에 들끓던 화가 폭발한다. 대답 좀 해, 말 이쁘게 안 할래?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늘 말이 고운 법이야. 내 단골 레퍼토리. 매사 부정적으로 말하는 아이의 말투가 거슬렸다. 참자, 참자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다는데. 그러나 한 번 거슬리기 시작하면 그 사람의 단점만 보이는 법.


이리저리 던져져 있는 책들, 옷가지들. “정리 언제 할 거야”하고 물어보면 “좀 있다 할게” 대답하고 왜 안 했냐고 물어보면 깜박했다는 답이 돌아오는 아이러니. 집중하지 못하는 태도, 시간 때우기 식의 공부. 언제까지 참고, 보고만 있어야 하는 걸까. 결국 일주일에 한 번은 참지 못하고 잔소리를 해대고 가을이는 이골이 난 표정으로 “알았어” 한 마디로 그 상황을 모면한다. 혼났으면 그다음 날이라도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 아닐까. 하지만 가을이는 대답만 할 뿐 다음 날도 똑같은 모습으로 날 실망시킨다. 긍정적인 말을 더 많이 해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반복되는 가을이의 행동에 나의 말투도 점점 곱지 않다. 벽과의 대화. 서로 다른 이중언어를 사용하는 것 같은 답답함. 중학생이 되면 더하다는 데 생각만 해도 눈앞이 캄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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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가을이와 병원으로 향했다. 진료를 기다리는 중에 가을이는 휴대폰에 집중한다. 평일엔 바빠서 휴대폰 할 시간이 없다는 걸 알기에 아쉽지만, 잠깐의 자유시간이 오면 그냥 내버려 둔다. 그 모습을 유심히 쳐다본다. 가을이는 휴대폰을 보며 실실 웃는다. 뭐가 저렇게 재미있을까. 평소에 저렇게 웃어 보이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시간에 휴대폰이 아닌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며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사춘기 자녀와의 관계에서 부모는 언제나 을이다. 저 표정을 보려고 부모는 을의 입장을 자처한다. 나라고 다르지 않다. 아이를 보며 ‘을답게’ 먼저 손을 내민다. “오늘 저녁 먹고 싶은 거 있어?” 대답을 해주면 고마운 일이고, 단답형으로 없다고 말해도 서운해하지 말아야 한다. “별로” “그래, 그럼 엄마가 알아서 준비할게.” 때론 한발 물러나는 센스도 필요하다. 더 이상 게임 하는 아이의 집중력을 방해하지 않는다.


사춘기로 접어드는 아이는 점점 낯선 사람이 되어간다. 내가 알던 다정하고 귀여운 아이에서 자기주장이 먼저인 청소년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 모습이 낯설어 나는 서운해하고 화를 낸다. 준비할 시간도 없이, 적응할 시간도 없이 변해버리는 아들의 모습이 안타깝고 아쉬워서. 하지만 적응해야 한다는 것도 안다. 서운함과 인정 사이에서 나도 나름 고군분투 중이다. 그 일환으로 점점 말은 아끼고 지켜보는 날이 많아진다. 때론 그 서운함이 큰 목소리로 표출되지만 매일매일 참을 ‘인’ 자를 새기며 지나갈 것임을 마음속으로 되새긴다.


병원 진료 후 가을이를 학교로 보내고 혼자서 장을 본다. 뭘 해야 웃어 보이며 저녁을 먹을까. 웃음 한번 보자고 고민하는 내가 우습다. 이래서 평생을 ‘을’로 사나 보다. 조금 더 시간이 빨리 갔으면 좋겠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린아이들의 행동을 그저 귀엽게 웃어넘기듯, 시간이 흐르고 여유가 생기면 아이의 말투나 행동이 우스워 보이는 때가 나에게도 오지 않을까. 너무 늦지 않게, 탈 없이 그런 날이 빨리 오길 고대해 본다.


사진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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