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쩔 수 없는 이야기
살다 보면 가끔 일어난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안 좋은 일. 재앙이라기엔 나만 당한 것 같고, 비극이라기엔 딱히 미워할 놈도 찾지 못하는, 이름도 제대로 못 붙이는 씁쓸함. 기타노 타케시의 하나비(1998) 속 주인공 니시의 감정선이다.
흉악범 검거 중 용의자의 총에 후배 형사를 잃은 니시는 아내 병문안 때문에 동료 호시베를 혼자 잠복시키게 된다. 호시베는 적의 기습으로 하반신이 마비됐고, 호시베의 아내와 딸은 그를 떠나게 된다. 니시는 병원비 때문에 야쿠자에게 빚을 졌지만 아내의 병은 악화되기만 하고, 아내는 딸을 잃은 슬픔으로 말도 하지 못한다.
니시는 어쩔 수 없는 일들을 겪게 되고, 다른 후배 형사도 같은 말을 하며 위로한다. 그래도 니시는 어떻게든 해보려 한다. 순직한 후배의 아내에게 계속 연락을 하고, 휠체어 신세가 된 호시베도, 대꾸도 못하는 아내도 계속 만나러 갔다.
그러나 상황을 좋게 좋게 풀어보려던 니시는 어느 순간 내려놓게 되고, 그때부터 영화가 시작된다.
2. 이성은 중요하지 않다
하나비가 흔한 복수물의 성격을 띠었다면, 니시의 태도가 변하는 순간은 굉장히 극적이고, 분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니시의 태도를 점진적으로 변화시켰고, 딱히 복수를 하지도 않는다. 이러면 관객들은 서사의 명확함도, 카타르시스도 느끼지 못한다.
이 영화의 주안점은 '이성'이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은 이성적 사고다. 감정에 지배받지 않고, 상황을 냉철히 분석한 후 적합한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건 지긋지긋한 정론이다. 우리는 우리가 쉽게 그러지 못하고, 그러지 못했던 적이 많다는 걸 안다. 결국 그게 진실인 거다.
영화는 이를 강조한다. 그래서 니시의 감정선을 분명하게 연출하지 않았다. 니시는 주차해 놓은 자기 차를 테이블 삼아 더럽히며 도시락을 까먹은 날라리들을 만나게 된다. 니시는 까불대는 이들을 쥐어박고 세차를 시키는데, 호시베를 쏜 사람이 이들 중 한 명이라고 분명 카메라는 잡았다. 니시의 직업은 형사다. 일반적인 플롯이었다면 분명 찾고 찾아서 그 날라리 머리에 총알이 박혔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고, 이는 영화의 방향성에 대한 힌트를 관객들에게 미리 전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니시는 이후 택시를 경찰차로 도색하고 은행을 턴다. 엄밀히 따지면 이 행위는 순직한 후배와 불구가 된 동료를 모욕하는 일이 되지만, 니시는 생각을 바꿔 돈을 구하고, 이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써서 상처를 보듬고자 했다. 얼룩진 따뜻함을 눈물겹게 호소한 것이다.
이렇게 소신 있지만 애매모호한 영화를 견인한 것은 이성의 반대쪽에도 거주하고 있는 음악과 미술이다. 호시베는 니시에게 그림 자재들을 선물 받는다. 상실감이 사라지지는 않지만 호시베는 열심히 그렸고, 그림들은 절묘한 타이밍에 절묘한 이미지로 컷전환을 담당했다. 마치 호시베가 니시의 행적과 감정들을 다 이해한다는 듯이 연출되었는데, 이는 상술한 관객들의 찝찝함을 감각적으로 해소하는 역할을 했다. 영화 인트로에 피아노 악보가 소용돌이처럼 꼬인 그림이 나오는데, 이것도 '감성'의 강조에 해당하고, 히사이시 조의 음악은 그림만큼이나 필수적인 윤활유 역할을 해줬다.
3. 강렬한 찰나이기에
호시베는 그림 그리기를 시작하지 못하다가 문득 영감을 받고 몰두하기 시작한다. 오브제는 '꽃'이었고, 동물들 머리를 지우고 이와 닮은 꽃을 삽입한 연작을 선보인다. 또, 니시의 아내가 말라죽은 꽃에 바닷물을 넣어 살리려는 장면을 통해 꽃의 이중적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부정적인 뜻은 죽음을 내포하는 시듦이고, 긍정적인 뜻은 어차피 죽으나 사나 움직이지 않는 식물이니, 아름다움을 간직한 존재 자체이다. 그래서 호시베의 그림 속 동물들은 이목구비 대신 꽃잎이 활짝 펴서 삶과 대조되는 어두움을 연상 지었다.
제목이기도 한 '불꽃'도 두 가지 뜻을 추측할 수 있다. 니시는 작은 불꽃놀이에 불을 붙이고 아내와 기다리다 잠잠하자, 다시 불을 붙이러 가다 폭죽에 맞을 뻔한다. 불꽃의 긍정적인 부분은 '반짝'하는 찬란함이고, 부정적인 부분은 폭발 이후에 밤하늘처럼 고요한 '소멸'이다. 그래서 꽃과 불꽃은 대비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사실 비슷비슷한 상징이다. 마치 니시와 우리가 겪은 안 좋은 일들에 죄책감을 가져야 할지 말아야 할지 헷갈리는 것처럼 말이다.
이성을 불모로 잡은 이 영화의 '애매함'은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 영화의 영문명은 "HANA-BI" 다. 불꽃을 포함해 불꽃놀이도 일컫는 일본어인데, 사전을 찾아보면 이 단어의 악센트는 1음절에 붙는다. 즉, 문법적으로 올바른 표기는 "HA-NABI"라고 볼 수 있다. 단순한 단어지만 영화의 핵심을 내포하는 잘 지은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이성의 편취를 통해 진실에 가까이하고자 했고, 그 진실의 감정적 종착지는 '필연'이다. 우연으로 인해 벌어진 어쩔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이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의 충만함을 만끽하는 것. 그래서 니시가 복수니, 형사로서의 미래니 다 제치고 시한부에 가까운 아내와 도망을 간 것이다. 또한 필연의 감정은 우연을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우연으로 결정 나기 전에 선택하는 것도 가능케 한다.
은행을 털고, 쫓아오던 야쿠자들을 죽이던 니시는 결국 후배 형사 둘에게 따라 잡힌다. 니시는 잠깐이면 된다며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한 후, 리볼버에 두 발을 장전한다. 그리고 아내와 끌어안고 모르는 여자아이와 연을 가지고 논다. 카메라는 인물들 반대쪽으로 천천히 이동하며 조용한 해변을 비추고, 두 발의 총성이 들리며 영화는 끝난다. 이렇게 열어놓은 결말은 상술한 필연의 의지를 나타낸다. 휘둘리던 니시가 아내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마지막 선택을 한 것이다.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동반자살에 무게감을 싣고 있다. 후배 형사는 '나는 저런 사랑은 하지 못할 거야'라는 말을 했고, 모르는 아이와 놀며 아내는 영화 속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맙다고 했다. 아내를 달래고자 했던 니시의 노력이 인정받은 것이고, 이는 마지막 과업에 해당됐다. 그리고 니시는 불꽃에 대입되는 인물이다. 아득바득 이어가는 생물보다는 처연하게 사라지는 불꽃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총알 두 알이 어느 머리로 향했든, 우리는 그 시체 머리를 꽃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