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_49. 영화 <한란>
1.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굴곡진 근현대사를 거치며 많은 상흔들을 남겼다. 영화는 현실을 보여주는 창이다. 당연하게도 이런 아픈 상흔들을 다시 한번 조명하여 사람들에게 정보를 전달하고, 그리고 정보 이상의 무언가를 느끼게 해주는 영화들 또한 수 차례 제작되었다.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의하면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의미한다. 확인 사망자만 1만여명 이상이고, 추정 사망자가 3만명 이상으로 예상되니, '비극'이라는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매체란 대중들에게 이런 사건을 전달할 의무가 있다. 영화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2>, <비념>, <목소리들>,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바로 이 '제주 4·3 사건'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2025년 11월 26일, 영화 <한란>이 다시 한번 '제주 4·3 사건'을 들여다본다.
2.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영화가 흔히 범하는 실수 중 하나는, 영화 내에서 구축해야하는 감정선을 해당 사건에서 일반적으로 느낄 수 있는 비극성에 위탁하는 것이다. 사람인 이상, 그것도 한국 사람인 이상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비극 앞에서 슬픔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당연한 슬픔이 아닌, 영화 자체적으로 이를 구축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당연하게도 비극을 표현하는 방식이 중요해진다. 그러나 영화 <한란>이 관객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방식은 지나치게 진부한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영화는 중요할 법한 행동에 슬로우 모션을 걸어 해당 동작을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보여주는데 이와 같이 슬로우 모션을 활용하는 방식은 지나치게 상투적이기 때문에 애절함보다는 고루함이 먼저 느껴진다.
토벌대에 속해 제주사람들을 학살하는 것에 일조하면서도 동시에 이런 행동에 대한 회의감과 죄책감 등 갈등을 겪는 '문 일병' 캐릭터 또한 여타 영화들에서 흔하게 살펴볼 수 있는 캐릭터다. 물론 범죄 집단 내에서 회의를 느껴 자신이 속한 집단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 되는 캐릭터라는 설정 자체가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의 내적 갈등을 묘사하는 방식이 1차원적이다. '비명 듣고 있기', '충격에 멍 때리기' 등, 단순하고 직접적인 방식들은 캐릭터를 납작하게 만든다.
극 후반, 삐라에 속은 마을 사람들이 백기를 들고 산 아래로 내려가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로 제주 사람들을 회유하여 학살을 저지른 사건은 명백하게 발생했던 역사적 사실이다. 다만, 영화는 하산하는 제주 사람들의 모습을 단순히 어리석은 사람들처럼 느껴지게끔 묘사하는데, 다소 안일한 극화지 않나, 생각된다.
3.
여러 아쉬움에도 이 영화를 끝까지 감상하게 만드는 가장 큰 힘은 배우다. 김향기 배우는 이번 영화를 통해 첫 어머니 역할을 맡았다. 심지어 현대 시대의 평범한 어머니가 아닌 격동의 시대, 비극의 한 가운데 놓인 어머니라는 어려운 설정임에도 충분히 소화해낸다. 역할만큼 어려웠을 것으로 보이는 것은 언어다. 영화 전체가 제주어로 진행되다보니, 연기하는 입장에서도 큰 도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제주어 화자가 아니다보니 성공적으로 수행해냈는지 직접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우나, 적어도 상당히 많은 공을 들여 준비했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김향기 배우의 경우 워낙 어린 시절부터 활동했던 배우지만, 언제부턴가 어린 시절의 모습을 확실히 떨쳐내고 본인의 연기를 펼치는 것처럼 보인다. 이번 영화에서 또한 그런 그림자 없이 성공적으로 아진을 연기한다. 한 배우가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느낄 수 있는 큰 행운 중 하나일 것이다. 김민채 배우의 아역 연기 또한 눈이 간다. 김향기 배우의 아역 시절을 보는 것과 같이 느껴진다. 똘망똘망한 눈동자로 다부지게 해생을 연기해내는 모습 또한 여타 배우들 못지 않게 눈길이 가는 부분이다.
4.
역사적 사건은 예민한 주제다. 이런 소재를 다룬 영화들일수록 하나의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들 속에서도 우리의 아픔을 잊지 않고 꾸준히 그 흉터들을 다룬 영화가 제작된다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본다. 다음 영화에서는 더 좋은 연출, 더 좋은 표현으로 상처를 쓰다듬어줄 수 있는 작품이 나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