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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작은 꿈을 꾸며 삽시다."

나를 키우기로 했습니다.

by 크런치바

"기필(期必)을 버려라."


60대의 인생 선배도 듣고 놀란 말이라고 한다.


살면서 늘 기필코 이루어내라는 말만 들어왔는데 기필을 버리라라니 신선한 충격이었다고 한다. 맞는 얘기라고, 인생은 '기필코' 되는 게 아니라고 했다. 뭔가를 이루려고만 하지 말고 흘러가보기도 하면 어떻겠냐며, 우리 제발 꿈꾸지 말고 살자고 했다. 꾸려면 오늘 하루를 어떻게 잘 살지, 그런 작은 꿈을 꾸면서 살자고 했다.


요즘 읽고 있는『여덟 단어』에서 박웅현 작가님께서 해주신 이야기다.


40대 중반, 이제 더는 아무것도 이루지 않겠다고 다짐한 나에게 편지처럼 다가온 구절이었다. '기필'을 버리고 살아도 괜찮다고, 차라리 버리고 살면 어떻겠냐고 얘기해 주는 인생 선배의 따뜻한 위로 같았다.


부지런히 박웅현 작가님의 연세가 어떻게 되실까 찾아보았다. 어림해 보니 이 책은 작가님이 60대에 접어들 무렵 쓰신 책 같았다. 인생의 마라톤을 60년이나 달린 분이 해주신 말씀이라면 이건 정말 믿어도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든든해졌다.


그래 그래, 내가 처음으로 먹어 본 이 마음이 꼭 실패의 끝에서 내린 어쩔 수 없는 선택만은 아닐 거다. 어쩌면 이제야 처음으로 내 삶을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이루지 않겠다고 했지만, 막상 나는 하루하루 여전히 성실히 살고 있다.


다른 걸 할 게 없다고 생각하니, 다른 최선을 할 게 없다. 그래서 아이와 남편과 보내는 시간에 충실하며, 무엇보다 나와 보내는 시간에 충실하다. 이 정도 주어진 일들 정도는 해낼 수 있지 않겠냐는 판단에 집안일과 수업들도 그럭저럭 성실히 해내고 있다.


그 덕에 하루는 여전히 바쁘게 흘러간다. 대신 뭘 더 해야 한다는 스스로에 대한 마음의 빚이 없어, 그놈의 답답함이 사라졌다. 저녁 한 끼 맛있게 먹고 설거지를 마치면 하루가 끝나는 날도 이 정도면 됐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것도 하지 말자 생각했을 때 이런 걸 예상했던 것은 아니다. 처음 그런 삶을 결정했기에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게 될지, 내 하루가 어떨지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대단한 걸 기대한 적이 없다는 게 이런 거구나, 생각이 든다. 차고 있던 무거운 모래주머니만 내려놔도 인생이 가벼웠다. 여전히 대단한 것들은 없지만, 작은 것들도 쳐다볼 여유가 조금씩 생긴다. '나 오늘 정말 행복했다.'는 아니어도 '오늘 정도면 괜찮은 하루였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날들이 늘고 있다.


견디는 삶에서 괜찮은 하루로의 변화도 나에게는 장족의 발전이다. 그리고 원래 인생이 그렇게 매일 "정말 행복했어."라고 말할 정도의 대형 행복 이벤트들을 주는 것이 아님을, 드디어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나는 이제야 처음으로 내 '현재'의 삶을 제대로 살아보는 기회가 생긴 것이 아닐까? 한쪽 문이 닫히면 한쪽 문이 열리는 그 고마운 인생 시스템 덕분에, 나는 내 능력의 한계와 무능을 인정하며 뼈아프게 '기필'을 버리고 '현재를 사는 방법'을 배우고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능력을 넘어선 내 꿈과 미래가 내 현재의 발목을 잡았었구나.'


내일도 나는 대단히 이룰 것이 없다. 그저 아침이면 하루를 잘 보내자 생각할 텐데, "오늘 하루를 어떻게 잘 살지, 그런 작은 꿈을 꾸며 삽시다."라고 말해준 인생 선배의 말씀이 떠올라 조금 더 자신 있게 하루를 시작할 것 같다.


하루하루를 꽉 채워 살다 돌아보면 펼쳐져 있는 게 인생이지, 단 하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하루하루를 허술하게 보내는 건 의미가 없다는 인생 선배의 이야기가 오늘 내게 보약이 됐다.


"그런 작은 꿈을 꾸며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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