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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지옥을 겪고 나니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다.

by 크런치바

살만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실이다.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다더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마 이러라고 시간들을 겪었나 보다.


눈치는 많이 봤지만 단순했던 내 머릿속은 근 1~2년 숨 쉴 수 없을 만큼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고, 그 덕에 잠시도 쉴 날이 없었다. 자려고 누우면 머릿속에 들어있던 것들이 하나하나 일어나 나를 깨워댔다.


미련한 나는 결국 하나씩 다 생각해 보곤 했는데, 신기하게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 모르는 미궁에 빠졌다. '두고 봐라, 오늘만큼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잠들겠다!' 비장한 다짐도 많이 해봤지만 쉽지 않았다. 그만큼 생각도 고민도 다시 내 머릿속에 채워지는 고통이 반복됐다.


그렇게 시작된 마음의 지옥이었다. 마음의 지옥에는 나만의 이유도 있었다.


나는 나의 무능력함이 싫었다. 내 능력으로 돈을 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친구들의 연봉과 멋진 옷차림을 마주할 때면, 숨겨놨던 내 욕망이 나를 자꾸 집요하게 바닥으로 거칠게 잡아당겼다.


따뜻하고 헌신적인 나의 엄마. 그런 엄마가 나의 육아를 도와주다 다치면서 무려 7년여의 시간을 아팠다. 그런 엄마에 대한 죄책감이 한가득이면서 나는 정성껏 효도도 하지 못했다. 우울하고 부정적인 엄마의 얘기를 듣는 것이 버거웠기 때문이다. 감사함과 죄책감, 따뜻함과 어두움... 그 많은 감정과 색깔들 속에서 내가 헤매고 있는 사이, 엄마는 늙었고 더 가난해졌다.


자식의 효를 바라던 시부모님. 늘 밝고 따뜻하시지만, 자식이 무언가 해주기를 바라신다. 아쉽게도 나는 별로 받은 적이 없다. 다행히 남편은 현실을 잘 알고 잘 대응해 주고 내 마음도 알아주었다. 하지만 가끔씩 무너져버리는 경계선에 나는 불안했고, 결국 예상치 못한 순간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이 남편에게는 막막함과 두려움을 주었다. 우린 결혼 15년 만에 처음으로 벽에 부딪혔다.


'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은 이렇게 요약해서 말할 수 있다니. 이것 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다.


다 해결이 되었냐고 누가 묻는다면, 해결되지 않았지만 해결되었다고 대답해야 할 듯하다.


나는 여전히 무능력하며, 나의 엄마는 한결같고, 시부모님도 변함없으시다.


그러나 나는 마주했다. 이것이 내게 주어진 것들이라는 것을. 피한다고, 부정한다고 바뀔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마음의 지옥에서 더는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신기하게도 받아들이고 나니 내 마음이 지옥을 벗어났다. 내게 주어진 시간들도 다르게 느껴졌다.


내가 대단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마음을 열심히 들여다보니 나는 내가 애틋하고 여전히 좋았다. 그래서 나를 소중히 대해주고 싶었다. 돈은 잘 못 벌어도 잘 씻고 먹였다. 그랬더니 서서히 재미있는 변화가 나타났다.


돈이 벌고 싶은 마음에 마냥 하찮게 보였던 나의 역할들이 의미 있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들을 돌보고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적지만 돈을 벌 수 있는 현재의 소소한 일거리를 잘 해내고 싶었다. 내 인생을 별 볼 일 없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순간을 성실하게 채워갔다. 무사한 하루가 감사해졌다.


매일 대단한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닌데, 아마도 내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용기가 났던 것 같다.


엄마는 여전히 '따뜻한 사랑'과 '버거운 하소연'이 공존한다. 바꿀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경험이 있었다. 내 마음이 너무 지옥이고 내가 너무 별로여서 슬펐던 날, 내가 유일하게 전화를 걸어 울 수 있었던 사람은 엄마뿐이었다. 그날 이후 마음을 바꿨다. '정말 숨 막힌다.'가 아니라, '우리 엄마 또 시작했네. 조금만 듣고 도망가자!'로 말이다.


남들이 보기엔 똑같은 얘기일까? 나에겐 아니다. 어둡고 무거운 심리극에서 밝고 가벼운 일일 드라마로 장르가 변경됐다. 살 궁리를 찾은 것이다.


가장 중요한 우리 부부의 관계도 천만다행으로 위기를 넘겼다. 우리는 서로 믿고 따를 수 있는 규칙, 경계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두운 한강 변에 앉아 수많은 모기에게 다리를 뜯기며 일말의 숨김도 없이 나눈 대화 끝에 찾은 해답이었다. 답이 없으면 어쩌나... 우린 사실 정말 두렵고 무서웠다. 힘껏 믿고 의지했던 부부 관계가 흔들리는 것을 마주한다는 건 생각보다 더 아픈 일이었다.


많이 아팠지만 다행히 서로를 위한 진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5년 결혼 생활과 함께 너무나 당연한 존재가 되어버린 남편에게, 이런저런 아쉬움을 잔소리하며 살고 있던 나는 그때 깨달았다. 남편 없이 살 자신이 없다는 것을. 적나라한 내 마음을 보았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고, 남편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남편과 더 잘 살기 위해 내가 노력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의 1~2년이, 지난 여름이 흘러갔다.


이래서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하나보다. 마음의 지옥을 겪고 어느덧 나는 좀 더 살만해졌다.


내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갖게 된 용기, 나의 가장 초라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엄마의 존재, 서로를 위한 진심, 당연한 줄만 알았던 남편의 소중함.


너무 당연한 듯한 이 말들을 나는 내가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나는 지옥을 겪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어리숙해서일까? 상관없다. 깨달았고 나아졌으니까.


문득 연말이 다가오고 있음을 인식하며 한 해를 돌아보니, 어느새 내 마음이 달라진 것을 느꼈다. 우연히 엘리베이터에 비친 나도 봤다. 전보다 밝고 가벼워 보였다.


'마음의 지옥을 겪고 나니, 살만해졌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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