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베토벤과 모차르트
재국의 차는 성깔만큼 깨끗했다. 맑은 음향의 베토벤 로망스 2번이 애절하게 흘러나왔다. 오케스트라는 복희가 가슴 밑바닥으로 눌러 놓았던 인간에 대한 그리움과 생명 있는 것에 대한 연민을 떠오르게 했다.
“음악이 먼 그리움으로 이끄네요.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요.” 복희가 말했다.
“저 때문에 늦었으니 당연히 모셔다 드려야지요. 요즘 왜 이런 곡이 좋아지는지 모르겠습니다. 학창 시절로 되돌아간 기분이에요. 사춘기가 다시 오는 것도 같고.”
“저도 이 곡을 참 좋아해요. 한 때는 음악에 푹 빠져 살 때가 있었어요.”
“아인슈타인은 모차르트의 곡을 안 들으면 죽음이라 했는데, 나는 베토벤 곡을 듣지 않으면 내 삶이 맹탕이었을 거 같아요.”
“지금은 맹탕은 아니라는 소리네요. 음악이 사람을 성숙하게 만들지요.” 복희가 웃으며 말했다.
“베토벤은 그를 덮은 모든 불행을 음표로 만들었어요.”
“슬프고도 아름다운 곡이 많이 있지요. 월광곡, 비창, 소나타 등.”
“그래서 귀는 즐거워 웃고, 마음은 슬퍼 울지요.”
“그런 감성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큰소리만 잘 치는 줄 알았는데.”
“나도 따뜻한 감성이 넘치고 때로는 멋있는 사람입니다.”
“모차르트도 그대로 즐겁고 울림이 있어요. 베토벤은 깊은 성찰을 주지요. 이제 집에 거의 왔어요. 여기서 세워주시면 돼요. 조심히 가세요.”
“집까지 모셔드리고 싶은데요.”
“(손을 흔들며) 할머니 안녕!” 하며 리라가 말했다.
“그래, 리라도 잘 가요.” 복희가 말했다.
재국은 아쉬운 듯 한참을 복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할머니 좋아하고, 할머니도 할아버지가 싫지만은 않아. 그렇지만 집까지 바래다주는 것을 할머니는 싫어해. 자유가 침범당한다고 생각하니까, 할아버지가 눈치가 있었다면 진도가 팍팍 나갔을 텐데, 쯧쯧.”
“뭐라고!?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데?”
“할아버지도 손녀에게 수업료를 내셔야지요.”
“뭐라고?”
다음날 아침, 복희는 마당 편지함에서 우편물을 꺼냈다.
‘발신인 oo카드사, 수신인 유복희’라는 흰 봉투를 보자 고개를 갸우뚱한다. 이상한 예감에 현관문을 여는 손이 떨린다.
복희는 편지를 뜯었다. 카드가 연체되었습니다. 언제까지 변제하셔야 합니다. 이율이 올라갑니다. 내역명세서 oo여행사, 독촉장이었다. 인상을 찌푸리며 왜? 누가? 기억을 더듬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파온다. 그대로 쓰러진다. 잠시 후, 손을 뻗쳐 간신히 화장대 제일 아래 칸을 열어본다. 통장은 그대로인데 카드가 없다. 대신 편지가 있었다. 정희였다. 손으로 두섬두섬 안경을 찾아 읽었다.
엄마!
엄마가 카드회사의 독촉장을 받을 때쯤, 아마 나는 알래스카에 있을 거야.
나는 병에 걸렸어. 이 몹쓸 병은 엄마가 주었지. 약으로도 치료할 수 없어.
사랑의 차별이지. 배고픔만큼 차별도 고통스럽고 아파. 고통에는 크고 작음이 없는 것 같아. 엄마는 모르겠지만 나는 학창시절에 많이 힘들었어.
외할머니가 아들을 못 낳고 딸만 났지. 아들을 선호했다는 변명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칠 년 전, 아버지와 알래스카로 가족여행을 갔었지. 나는 회사의 면접시험 때문에 갈 수 없었어. 어려운 1차 시험을 합격한 후여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엄마는 여행보다는 취업이 더 중요하니까 섭섭해하지 말라고 했어. 다음에 엄마가 꼭 보내준다고 약속까지 하였지만 엄마는 약속을 잊었어. 왜 나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엄마만 기억이 날까? 사랑도 함께 주었는데. 그게 사람인가 봐.
내 기억 속 엄마는 나와 놀아주는 기억보다 훈계하는 모습만 남았어.
엄마가 혼낼 때마다 나는 속으로 고함쳤어.
'엄마, 여기는 학교가 아니라 가정이야. 나는 엄마 학생이 아니라 딸이라고, 딸!'
아침에 깰 때도 나한테는 사납게 “정희야, 빨리 일어나 늦겠어!” 하였지.
그러나 오빠한테는 부드럽게 “우리 정도야, 일어나야지!” 하며 불렀지.
그 소리를 들었던 날은 하루가 더럽게 느껴졌어.
나는 진심으로 묻고 싶어. 나에게 미안한 마음이라도 조금은 있는 지를.
행복한 순간도 많았지만 왜 섭섭한 생각만 남는 것인지, 나도 모르겠어.
추운 곳에서 냉철하고 상식적이며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고 싶었어.
엄마, 나도 엄마를 이해하고 잊고 싶어 떠나는 거야.
이제 나도 엄마가 될 텐데, 엄마답게 살아야지 원망만 할 수는 없잖아.
이번 여행길에 답을 얻을지는 모르겠어. 속이 시원할 수는 있을 거야.
엄마, 카드빚은 엄마가 조용히 해결해 줘, 누구한테 알리지 말고.
엄마, 말없이 카드 가져가서 미안해. 이 여행은 엄마하고 연관되어 있고, 나는 큰돈은 없어. 엄마에 대한 몹쓸 생각일랑 태평양에 다 버리고 올게.
지난번처럼 아프지 말고 남도 도우면서 원래 엄마처럼 씩씩하게 살아!
엄마 사랑하고 미안해!
복희는 편지를 다 읽고 정희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정희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배가 다시 쓰려온다. 눈을 감는다. 이대로 눈을 뜨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