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늘 Aug 19. 2024

10년 전 그 밤을 기억하며

 그날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해. 모두가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늦은 밤, 넌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조용히 화장실로 들어가선 수돗물을 틀었고, 그곳에 양치컵을 천천히 가져다 대었어. 찬물이 찰랑거리며 컵을 가득 채우는 동안 넌 그 모습을 그저 가만히 내려다보았어. 다 채워진 컵을 들고 한동안 머뭇거리며 무엇인가를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컵을 들어 올려 네 몸 위로 냅다 부어 버렸지.


 잠옷까지 입은 네 온몸을 다 적시기에는 컵이 턱없이 작았던 탓에, 한 번 두 번 세 번.. 같은 행동을 몇 번씩이나 반복했어야 했어. 피부로 느껴지는 차디 찬 냉수에 온몸에는 닭살이 돋아났어. 온몸이 찬물에 젖어 차갑게 식을 때까지 너는 비워지는 잔을 계속해서 채워냈어.


물을 들이부은 순간부터, 아니 침대에서 일어난 그 순간부터 네 머릿속은 이 행동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너를 멈춰줄 수 있을 만한 해결책은 이것뿐이었기에 그저 참아낼 수밖에 없었어.


 너를 제외한 모든 세상이 잠에 빠져든 한밤중. 그 고요한 적막 속에선 졸졸졸 물이 흐르는 소리만이 백열등으로 온통 붉게 물든 화장실을 가득 채웠고, 죽은 두 눈동자만이 쫄딱 젖은 생쥐꼴의 여자 아이를 비추고 있을 뿐, 그곳에 살아 있는 것이라곤 보이지도 않았고, 존재하지도 않았어. 이미 네 마음은 깊은 눈물바다에 쓸려 익사해 버린 뒤였으니까.


 네 몸이 네가 원하는 만큼 어지간히 젖었는지 마지막으로 컵을 가득 채우고서는 그대로 방으로 돌아가 방 문을 잠갔어. 옆방에서 자고 있는 언니가 행여라도 깨어나면 안 되니까, 이 집에 있는 가족 중 아무도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서는 안 됐으니까.


  깜깜한 방을 걸어가 달빛이 은은하게 새어 들어오는 베란다의 창문을 활짝 열었어. 산을 타고 불어오는 밤바람이 순식간에 방 안으로 휘몰아쳐 들어왔고, 그렇게 뼛속까지 시린 찬 기운이 너의 온몸을 덮쳤어.


 달빛과 별빛이 유난히 하얗게 밝았던 날, 넌 달빛이 비치는 방바닥에 누워 마지막 물컵을 가슴 위에다 천천히 기울였어. 심장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어. 온몸이 덜덜 떨리고, 곤두선 솜털들은 까칠까칠한 가시가 된 듯했지. 당장에라도 젖은 몸을 수건으로 닦고, 보송보송한 옷을 입고서 이불속으로 들어가고 싶었어. 하지만 넌 그럴 수 없었어. 이렇게 해서라도 아파야 했으니까. 고열이라도 난다는 핑계를 대서라도 ‘그곳에’ 가고 싶지 않았으니까. 산바람을 맞아 부들부들 거리는 몸을 새우처럼 웅크린 채로 넌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감았어.


 생각했던 것보다 감기란 건 쉽게 걸리는 게 아니었어, 그렇지? 옷은 여전히 차갑고 축축했지만, 고열은커녕 잔기침도 나오지 않았어. 그런 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따뜻하게 너의 온몸을 감싸며 빛나고 있는 아침 햇살이 얼마나 밉기만 하던지. 밤새도록 고생은 고생대로 했는데 아무런 성과도 없는 상태로 아침을 맞아야 했던 넌 엄청난 좌절감을 느꼈어. 그래도 어쩌겠어. 이미 날은 밝았고, 넌 미열조차 나지 않으니 하는 수 없이 학교에 갈 준비를 할 수밖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