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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 Aug 24. 2024

거인국에서 베이커로 살아남기

와장창 깨져 버린 워홀러의 로망

나는 밴쿠버에서도 시나몬롤로 매! 우! 유명한 로컬 카페에서 바리스타 겸 베이커로서 일하고 있다.

아 실수,


베이커 겸 바리스타로서 일하고 있다.


워홀러 신분으로 캐나다에 온 나는 바리스타에 대한 강한 로망이 있었다.


일단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조건은 로컬 카페여야 했다.


해외까지 나왔는데 이곳에서까지 한국인들과 복작복작하게 지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해외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 영어와 외국 문화를 두루두루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첫 조건이 성립되면, 그곳에서의 내 이상적인 바리스타로서의 삶은 이러했다.


화사하고 깨끗한 메이크업은 디폴트 값.

거기다 긴 머리카락은 뒤로 대충 묶은 듯하면서도 잔머리가 예쁘게 흘러내리는 느낌의 자연스러운 스타일.

옷은 깔끔하면서 세련되게, 꾸민 듯 안 꾸민 듯한 일명 꾸안꾸룩.


이렇게 훈훈한 비주얼로 단골손님들과 웃으며 안부 인사를 나눈 뒤 멋들어지게 커피를 내리는 그런 바리스타의 삶...


그래 이게 내가 원했던 로컬 카페 바리스타의 삶이었단 말이다.


하지만 첫날부터 나의 이 바람은 와장창창 쨍그랑 빠그작 깨져 버렸다.


일단 오전 4시 반까지 출근해야 하는 오픈조로 일해야 했기에 화장 따위 할 시간도 없었다.


아니, 그 시간에 잠이나 더 자야지 무슨 화장이냐며, 그렇게 하루 만에 화장을 포기했다.


그냥 대충 세수하고 스킨 로션만 바른 뒤 출근을 하는데, 그래도 예의상 연한 색의 립글로스는 발라준다.


가끔은 연하게 피부톤을 밝혀주는 선크림을 바르기도 하는데 이것도 귀찮아서 대체로 쌩얼로 나간다.


그리고 내가 일하는 카페는 모두가 바리스타 겸 베이커(<-매우 중요)로 일을 하기 때문에, 모든 코워커들이 출근하자마자 해야 하는 일이 있다.


이것이 바로 나의 로망을 개박살 낸 장본인이자 범인인데, 그것은 바로 헤어캡이렸다.


밀가루를 반죽하고 빵을 굽는 일을 모두가 돌아가며 해야 하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서든지 머리카락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려는 건 이해는 하겠지만, 한 매니저의 모습을 보면 조금 의문이 들 때가 있다.


그 매니저의 헤어캡을 쓴 머리는 민머리인데 반해, 수염이 난 하관은 정돈이 되지 않은 모습인 것을 보고, 이게 과연 큰 의미가 있을까 사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머리카락을 방지할 거면 저 수염도 어찌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무튼 제 아무리 바깥에서 예쁘고 잘생긴 사람이었다 할지라도, 이 마~~ 법의 헤어캡을 쓰는 순간 바로 귀여워진다.


순화해서 귀여워졌다고 하는 거지, 실제로 귀엽다는 건 아니다.


이곳이 동네 미용실인지 해외 카페인지 헷갈릴 정도로 그냥 No mood,


있던 멋도 도망가 버리게 하는 바로 그것이 헤. 어. 캡.


헤어캡이 얼마나 사람의 이미지를 바꿀 수 있냐고 묻는다면 한 일화가 있다.


같이 일하는 코워커의 헤어캡을 쓴 모습만 보다가, 하루는 그 애가 손님으로 온 적이 있다.


헤어캡을 쓰지 않은 그 아이의 모습은 본 적이 없어서, 며칠을 같이 일했던 코워커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알아보지도 못한 채 주문을 받았더랬다.


그래서 그 친구가 조금 당황해하며 ‘아르바이트생한테 드링크 공짜잖아~ 그렇지?!’라고 운을 띄워준 뒤에야 ‘...  너 혹시 한나니...?’라며 머리를 탁 쳤던 적이 있다.


이만큼 헤어캡의 파워는 잘 보이는 두 눈을 심봉사로 만들 만큼 강력하다.



거기다 우리는 유니폼도 있다^^!!!


베이커라서 반죽이나 각종 시럽이 묻을 일이 많기 때문에, 우리는 흰색 가운에 흰색 앞치마까지 두르고서 일을 한다.


유니폼도 할 말이 많은데, 일단 외국 애들이 덩치가 한참 커서 그런지 S를 입어도 어깨빵이 대단하다.


가끔은 세탁 업체가 일을 느리게 해서 L 사이즈를 입은 적도 있었는데, 이건 뭐... 할말하않 그 자체였다.


S도 큰데 L은.. 굳이 설명이 필요할까..?


다크서클이 얕게 깔린 눈,
로션만 바른 완전한 쌩얼,
지금도 죽도록 쓰기 싫은, 멋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헤어캡,
폼이 유난히도 큰 유니폼..


그렇게 내 로망이었던 바리스타의 삶은 시작도 해보지 못한 채 깨져 버렸다.



하루는 한창 바쁘게 일하는 중에 한 손님이 들어왔다.


그 손님을 보자마자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주인공인 하울이 현실에 존재한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그 사람이 들어온 순간 바람에 흩날리는 그의 머리칼과 전체적인 분위기는 내 두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안구정화를 느낌과 동시에 헤어캡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수치스러웠다ㅋㅋ..


가끔가다 잘생긴 손님이 오면 뭐 하냐고!!!
헤어캡부터가 이성적인 매력을 반틈도 아니고 죄다 사라지게 만드는데!!

라며 울분을 토하곤 했다.. 가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이 헤어캡을 벗어던지고 싶을 때가, 불태워 버리고 싶을 때가 많다.


그래도 이런 멋들어짐이라곤 하나도 없는 세팅값으로, 덩치가 내 두 배는 되는 코워커들까지도 귀염뽀짝하게 만들어 준 덕분에 처음이라 모든 게 어색했던 내가 코워커들에게 쉽게 친근감을 느낄 수는 있었다.. 그래 이게 유일한 장점이다.

5~8시간을 일하고 난 후에 땀과 온갖 반죽, 시럽으로 더럽혀진 유니폼과 헤어캡을 벗고 나면 그야말로 제대로 된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이마에는 헤어캡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한동안은 이마에 줄이 쫘악 그어진 채, 앞머리도 볼륨을 잃어 납작하게 머리에 붙은 채로 퇴근길에 나서지만, 이런 상태도 계속 반복되다 보니, 퇴근 후 모자를 쓰던 버릇도 없어져서 이젠 자연인인 그 상태 그대로 집으로 가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래, 이미 로망 따위 버린 지 오래다.


헤어캡을 쓴 채, 제 키에도 맞지 않는 테이블 위에서 돌돌돌돌... 시나몬롤을 말고, 까치발을 들고서 힘겹게 롤을 커팅하고 있는 나를 보면, 내가 생각해도 이런 내 모습은 거인국에 잘못 도착한 한 마리의 다람쥐처럼만 느껴진다.



요즘엔 20kg의 밀가루 3포대를 엄청나게 큰 믹싱 기계에 넣고, 많은 양의 물과 재료들과 함께 혼합한 뒤 기계를 돌려 밀가루 반죽을 만드는 새로운 파트의 일을 배우고 있는데, 속히 말해 진짜 뒤질 것 같다.


허리가 먼저 나가나, 영혼이 먼저 나가나 내기하다가, 이내 내 의견은 무시한 채 둘이서만 합의를 보고서 함께 나가 버린 것처럼만 느껴지는 일이랄까.


낑낑거리며 여차저차 모든 재료를 넣은 뒤에는 믹싱할 때 밀가루가 카페 전체에 흩날리지 않도록 대따 큰 천을 기계 위에 씌운다. 그리곤 모두에게 들리도록 “starting dough!”를 크게 외친 뒤 시작 버튼을 누른다.

(말 안 해도 기계 소리가 커서 다 알 텐데..)


천을 씌웠지만 재료를 넣을 때부터 작은 가루들이 공기 중에 떠다니는데, 먼지 알레르기가 있는 나는 그때부터 엣취엣취 재채기를 시작한다. 그 덕분에 모두로부터 은총을 (“bless you”) 받으며 지낸다.


반죽이 다 되면 그 반죽들을 모두 테이블 위로 끄집어내야 한다. 칼을 들고 톱질하듯 반죽을 끊어내며 끌어올려야 하는데, 이게 통으로 뭉쳐 있다 보니 무게도 무겁고 반죽이 찰져서 잘 떨어지지도 않는다.


거기다 거인국 아니랄까 봐.. 믹싱기계의 보울은 어찌나 크고 깊은지, 반죽을 퍼내려고 허리를 숙이고 있다 보면 내가 앞으로 고대~로 고꾸라져 반죽에 빠져버릴 것만 같다.


평생 빵순이로 살아오면서 먹었던 수많은 빵들이 이렇게나 수고로운 일을 거쳐 만들어지는 아이들이었구나, 중노동에 가까운 이 일을 몸소 배우면서 빵을 대하는 마음가짐까지 달라졌다.


이젠 아무리 작은 빵이라도 그 소중함을 절실히 느끼고서, 그것을 만들기까지 열심히 땀과 노력을 쏟았을 베이커 분들에 대한 감사함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아.. 난 내일도 오전 3시 반에 일어나 베이커 겸 바리스타로 출근해야 한다.


시나몬롤로 밴쿠버에서 유명한 카페인만큼 가게 문을 열자마자 사람들이 엄청 많이 찾아온다.


그래서 한숨을 돌릴 수 있는 시간은 브레이크 타임인 30분이 고작, 하루 종일 정신없이 일을 해야 해서 매번 흐물흐물한 녹초가 되어서야 가게를 나가곤 한다.


그렇지만 피곤한 와중에도 절대 네버!!!! 어글리 코리안이 되지 않으려고 출근한 순간부터 퇴근하는 순간까지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일을 하며 영혼을 갈아 넣는다.


아마 남들이 보면 혼자 겁나게 바삐 돌아다니는 다람쥐로 보이겠지..ㅎ


아무렴 어때, 나 하나가 큰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는 없을지라도, 작게나마라도 좋으니 한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남기는 게 먼저다.


메이플 시럽이 흐르는 거인국의 나라에서 지내고는 있지만 난 뼛속부터 대한민국의 불타오르는 열정의 피가 흐르고 있는 걸!!!

(이라고 혼자 외쳐 봅니다..)



그리고 힘은 들더라도 이렇게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는 것에 의의를 두려고 한다.


평생 베이커로 일한다는 건 생각도 해본 적 없었는데 이렇게 해외까지 나와서 베이커로 살고 있으니... 삶이란 한 치 앞도 모르는 거구나, 그래서 참 흥미롭고 재밌는 게 삶이구나~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함께 일하는 20명이 넘는 코워커들이 너무나도 좋다.

함께하는 사람이 좋은 덕분에 나도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일하고 있는 카페에서와 같이 난 앞으로도 수많은 경험들을 통해 새로운 기술들을 계속해서 배워가려고 한다.


그리고 여러 나라의 사람들을 만나 다양한 문화도 접하면서 지금보다도 더 다채로운 모습의 내가 되어 살아가려고 한다.


매력이 까도 까도 끝이 없는 팜므파탈 다람쥐가 될 거야!!!!!!!!


아 그래도 앞으로는 베이커 일은 절대 안 할 거다. 못하겠다. 그냥 감사한 마음으로 빵을 사 먹는 다람쥐로 살아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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