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이다. 하루종일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집에 돌아오면 가끔은 멍해지고 싶을 때가 있다. 매일 그런것은 아니지만 유독 감정적으로 의존적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 날이면 그날은 아무런 자극이 없이 혼자 고요해지고 싶어진다. 딱 그런 날이었다.
쇼파에서 쉬고 있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온다. 고요해지고 싶은 시간이었지만 반가운 마음에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평온함을 청하던 나의 마음에 돌을 던지신다. 내용은 엄마와 아빠의 건강문제로 시작해 올케언니가 수술받는 내용, 그런데 오빠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10분간 쉬지 않고 이야기를 하셨다.
이 모든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나는 지치고 냉담한 목소리로 한마디 내뱉어냈다.
"엄마.. 내가 전화 안받았으면 어쩔뻔했어?"
이 한마디 질문엔 여러가지 생각과 감정이 함축되어 있었다.
엄마의 불안을 왜 나한테 말해? 오빠와 올케언니의 문제를 나보고 어쩌라고?
엄마가 서운하셨나보다.
"그럼 내가 자식한테 이야기하지 누구한테 이야기하니?"
머리가 희끗한 노인이 본인의 힘든 감정을 소화하지 못해 한참이나 어린 딸에게 전화하여 자기의 힘든 감정을 소화시켜 달라며 징징대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상상되며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엄마의 감정이다.
내가 느끼는 불안은 엄마의 불안이었고, 내가 느끼는 화는 엄마의 화였다. 그리고 나도 엄마처럼 이 감정을 소화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소화되지 못한 감정은 연료가 되어 마음의 화염방사기가 되었고 나는 엄마에게 불을 질렀다.
"엄마의 불안은 엄마가 해결해!!"
엄마가 나에게 전가시키려던 불안을 나는 받지 않았고, 다시 엄마에게 되돌려주었다. 그리고 엄마의 감정에 휘말리지 않았다며 나 스스로를 칭찬하고 위로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계속 찜찜했다. 엄마가 나에게 의존하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생각은 뭔가 불효를 하는 것 같아서였다. 불편한 마음때문이었는지 한동안 엄마에게 전화통화를 하지 않았다.
잘 통합되고 성숙한 노년기를 지났으면 하는 엄마의 모습을 기대했던 것일까.. 씩씩한 할머니를 기대했던 것일까? 그동안 엄마는 그냥 든든한 사람이었다. 간혹 불같은 성격이 있어 나와 부딪히긴 했지만, 문제 상황들에 있어 판단력이 좋아 나의 중심을 빨리 잡아주는 분이었다. 막내였던 나는 심리적으로 엄마를 많이 의지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엄마는 작은 일에 안절부절 못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아이같은 모습을 자주 보이셨다. 이런 모습이 아마도 받아들이기 힘들어 피하고 싶었던것 같다. 우리 엄마가 늙었다는 것과 엄마를 책임질 진짜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싫었구나.. 아직은 기대고 싶은 엄마의 이미지를 놓아주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던 것이다.
운전하고 오면서 한참을 울었다.
엄마.. 나는 계속 엄마한테 기대고 싶은데.. 이제 나 누구한테 기대야되?
과거의 엄마를 떠나보내기 싫은 내 마음이었다.
오랜만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마치 아무일도 없으셨던 것처럼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신다.
"일 끝났어?" "밥은 먹었니?"
사과를 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이해했던 사이였지만 이번엔 꼭 사과를 하고 싶었다.
"엄마.. 미안해.. 지난번엔 내가 잘못했어"
"엄마.. 많이 힘들지? 이런 상황에서 안힘든게 더 이상한거지.. "
엄마의 마음을 다독여드린후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강해져야 한다.
강해져야 한다.
나는 강한 사람이다.
나는 강한 사람이다.
이제부터 내가 엄마의 보호자이다.
이제부터 내가 엄마의 보호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