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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뒤가 앞뒤로 바뀐 세상> - 프롤로그

빨간불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세상

by 황준선

주상이 이상함을 처음 느낀 건,

누구나 하루에 수십 번씩 지나치는 신호등 앞에서였다.


초록불이 켜지자,

그의 오른발이 인간의 오래된 본능처럼 자연스레 앞으로 나갔다.


그는 신호가 바뀌는 순간의 조용한 긴장감을 좋아했다.

십여 년 전 어릴 적, 어머니 손을 잡고

신호등이 바뀌자마자 맞춰 뛰어가던 기억의 잔열이

그 움직임 속에 남아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발끝이 횡단보도 하얀 띠에 닿기도 전에,

사방에서 날카로운 숨 멈춤이 동시에 터졌다.


“뭐야, 저 사람?”

“초록불인데 움직이네.”

“위험하게 굴지 마요!”


공기의 흐름이 잠깐 울렁거렸다.

주상은 자신이 무슨 범죄라도 저지른 줄 알았다.

고개를 들자,

사람들이 모두 멈춰 서 있었다.

초록불이 켜진 길을,

그 혼자만 건너려던 것이다.

주상은 본능적으로 발을 거둬들이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신호등이—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이번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군중의 물결처럼 일제히 건너기 시작했다.


학생, 직장인, 노인, 유모차를 미는 부모까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가 빨간불에 맞춰 건너고 있었다.


주상은 그저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만 시간에서 밀려나온 낯선 이방인 같았다.


“…빨간불인데, 왜…”


주상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주변 소음 속으로 빠르게 흡수됐다.


그때였다.

옆에서 기다리던 중년 여성이 갑자기 주상을 바라보더니,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저기요, 초록불에 움직인 이유가… 뭔가요?”


주상은 당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 그냥, 습관처럼요. 왠지 예전에… 초록불에..”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 아아… 머리… 어지러워…”


그녀는 관자놀이를 움켜쥐고 비틀어지듯 고개를 숙였다.

옆의 남편이 재빠르게 부축했다.


“여보, 또 그런 말 들으면 안 되잖아. 괜찮아. 원래 초록불엔 멈추는 거야.

우린 항상 그랬어.”


남편의 말투는 아내를 달래기 위해서였지만,

대사 한 줄 한 줄이 마치

스스로를 세뇌하는 주문처럼 떨리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역각성인가 봐.”

“또 시작이네.”

“이 구역은 특히 민감하다니까.”


누군가 스마트워치를 터치했다.

잠시 후, 신호등 위 스피커에서 달래는 듯한 안내음이 울렸다.


“시민 여러분, 역각성 의심 사례가 감지되었습니다.

정신안전요원이 곧 도착하오니 불필요한 접촉을 삼가 주십시오.”


순간 주상의 뒷목이 얼어붙었다.

역각성.

뉴스에서 수없이 들었던 단어.


“이전 세계의 사고방식을 떠올리는 위험증상.”

“현실감 붕괴, 공포 반응, 공격성 유발 가능.”


사람들은 그 말만 들어도 몸을 움츠렸다.

누군가 ‘예전엔 초록불에 건넜다’는 식의 말을 하면

주변 사람들까지 정신적 충격을 받아

자살하거나, 광증에 사로잡히거나, 폭주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주상은 자신이 방금 말한 단어들을

필사적으로 머릿속에서 지웠다.

초록불… 건너다…

그 문장들이 방금 여자의 혼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정신안전센터 차량.

흰색이 아니라 청록색,

창문은 바깥이 보이지 않게 어둡게 착색되어 있었다.

문에는 큼지막하게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정상으로의 회복을 돕습니다]


그 문구를 보는 순간,

주상은 이마 깊은 곳에서 이상한 감각이 번졌다.


‘정상.’

그 단어의 무게가

자신에게만 역방향으로 박히는 듯했다.


차량이 멈추고 요원 두 명이 내려

어지러워하던 여자를 침대에 눕혔다.


남편은 계속 중얼거렸다.

“괜찮아, 여보. 초록불엔 멈추는 거야. 원래 그래왔어…”


그들의 목소리가 멀어져 갔다.

주상은 자신의 심장이 또다시 반박하는 듯 뛰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원래?’

‘우리가… 원래 이렇게 살았나?’

그의 손등에 누군가 손을 포개며 말했다.

“조심해야 합니다.”

주상이 고개를 들자

낡은 재킷을 걸친 택시기사처럼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피곤해 보이지만 눈빛만큼은 너무도 맑았다.

“초록불에 움직이는 건… 이 근방에서는 큰일 납니다.”

“…왜요?”


남자는 주변을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이 세상은 지금 거꾸로 흐르고 있어요. 모두가 모를 뿐.”


주상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지후라고 합니다. 당신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요.”

“…저는 주상입니다.”


지후는 미세하게 웃으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주상씨.

이상함을 처음 본 사람의 눈을 하고 계시네요.”


그는 살짝 신호등을 가리켰다.

빨간불.

사람들이 건너고 있다.

초록불.

사람들이 멈춰 있다.

그리고 낮게 속삭였다.


“이 세계에서 ‘원래’를 기억하는 사람은 절대 티 내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후는 정신안전센터 차량이 멀어지는 방향을 가리켰다.


“저 차에 실려 가는 건 아까 그 여자가 아니라, 당신이 될 테니까.”


주상은 숨을 들이쉬었다.

지금 자신의 세계가 처음으로 무너지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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