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은 참, 어렵다

욕망은 결핍을 깨닫게 한다

by 리라작업실


아침에 서둘러 외출한 탓에 끼니를 챙기지 못했다. 젊고 지금보다 건강했을 때에는 배가 아플 정도로 고플 때까지 그럭저럭 버티기도 했지만, 지금은 한 끼만 걸러도 생활에 큰 지장이 생길 정도로 타격이 크므로 몸에 꼬박 연료를 넣어주려고 한다. 아픈 건 너무 견디기 힘드니까, 힘들다고 찡찡대기에도 나이를 많이 먹었으니까. 결국 모든 게 나이 탓으로 귀결되는 것 같아 슬프지만, 나이를 먹는 게 꼭 슬프다거나 씁쓸한 일만은 아니라는 걸 알 정도로 나이를 먹기도 했다. 나이 얘길 너무 늘어놓았더니 어딘가에서 “뭐가 나이가 많아?!” 하고 호통을 칠 것만 같아 괜스레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된다. 아직도 이렇게 새가슴인 걸 보면 나이를 덜먹은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천성인 건가)


무튼, 빈속에 혈당이 급격히 떨어지면 안 되니까 볼일을 마치고 근처 카페에 가서 커피를 시키며 디저트류를 살폈다. 키오스크 옆에 먹음직스러운 스콘 포스터가 세워져 있는 게 보이길래(유혹에 약한 편이다) 망설임 없이 스콘을 주문하려 했더니 솔드 아웃, 남은 건 햄 치즈 샌드위치와 크루아상이었다. 평소 크루아상도 좋아하지만 햄 치즈 샌드위치를 먹으면 단백질(햄)과 칼슘(치즈)도 섭취할 수 있고, 가격도 300원 저렴하니 더 이득이 아닌가 싶어 나름 머리를 굴려 햄 치즈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평소 행동은 굼뜬데 먹는 거에는 머리가 빠르게 돌아간다.


샌드위치만 매장에서 먹고 커피는 포장해 갈 생각으로 직원분께 부탁드렸더니 근사한 백발 머리의 직원분이 친절하게 알겠다며 응대해 주셨다. 웃는 얼굴, 친절한 말투에 기분이 좋아지며 한결 마음이 놓였다. 서비스 직종의 감정노동이 공론화되고 서비스직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너무 서비스적 마인드를 바라는 것도 ‘진상’이란 인식이 생기면서부터 나 역시 조심하게 된다. ’진상‘이 되지 않으려고 직원 눈치를 살피게 되는 것이다. ’손님이 왕‘이라는 분위기가 만연할 때가 마냥 좋았던 건 아니지만, 조심할 게 많아진 세상도 피로를 불러온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건 물론 중요하지만, 내가 ‘야’ 하면 네가 ‘호’할 수 있는 세상이길 바라게 된다. 다른 사람 맘이 내 맘 같기를 바라는 게 욕심이라면, 내가 ‘야호’하면 네가 ‘야호가 뭐야? 난 야호하는 거 싫어.’ 그럼 내가 ‘그랬구나, 몰랐어. 이제 야호 안 할게.’ 하고는 허심탄회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라도 되면 좋겠다. 점점 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멀어지고 벽은 높아만 져서 오해의 폭도 더 깊어지는 것 같은, 세상도 복잡해지고 인간관계도 복잡해지는 기분이 든다. 그러니 사람 직원을 대하는 것보다 키오스크 기계에 주문하는 게 더 편안해지는 거겠지.


나랑 다르면 ‘죽일 놈’이 되는 극단적인 혐오가 들불처럼 일어나 사람들 마음을 집어 삼키고 있는 것도 역시 사람과의 관계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를 향해 웃어주는 사람은 얼마나 귀한가. 내가 화를 내서 너 역시 화가 나더라도 서로 풀고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사이는 얼마나 소중한가. 샌드위치와 커피를 기다리면서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는 카페 안 손님들을 둘러보았다. 물론 물리적 거리가 가깝다고 해서 그들 마음의 사이까지 가깝다 속단할 순 없겠지만, 곁에 머무는 이는 고마운 사람이다. (사랑을 느끼게 하든, 타산지석을 느끼게 하든 간에)


그 사이 주문한 커피와 샌드위치가 나왔다. 햄 치즈 샌드위치는 매장에서 직접 만드는 것이 아니라 완제품을 들여와 파는 것이었다. 작은 사이즈에 살짝 실망하고 하얀색 종이 포장을 조심스럽게 벗겨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식빵 4분의 1조각 가운데 치즈를 햄 두 조각이 감싸고 햄과 빵이 접한 면엔 블루베리 잼이 발라져 있는 모양새였다. 익숙한 맛이었고 그럭저럭 먹을만했지만, 뭐랄까 사람이 먹는 음식이라기보다는 상품에 가깝다고 느껴졌다.


단가를 생각해 사이즈를 줄이고 소스와 재료를 조합해 먹을만한 맛을 내고 적당한 방부제 함유로 보관 기간을 늘여 판매를 용이하게 만든 상품. 갓 나온 빵의 열기와 식욕을 자극하는 향긋한 냄새도 만드는 이의 정성도 느낄 수 없는 일회용 상품. 하긴, 일회용이 아닌 식품이 있겠냐마는, 음식에게서 ‘인정(人情)‘을 느끼기에는 빵이 너무 차가웠다. 집밥을 바란 것까진 아니었어도 누군가의 만듦새가 보이는 음식이길 바랐던 나의 욕망은 샌드위치의 가격 가치에 비해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자본주의가 깔깔 코웃음칠만한 욕망이었던 걸까.


욕망은 결핍을 깨닫게 한다. 내가 지금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게 만든다. ‘인정(人情)’을 갈망하고 있음을 2,500원짜리 샌드위치를 먹다가 느낄 줄이야. (어떤) 음식에는 ‘진짜 마음’이 없다. 네가 이 음식을 먹고 배를 채우고, 영혼도 채우길 바라는 그런 진심 같은 게. 역시, 너무 많은 걸 바랐는지도 몰라.


진심은 참, 어렵다. 그래서 더, 갖고 싶게 만든다.



20250311의 기록 by 리라작업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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