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빨강 Nov 26. 2024

엄마의 요약본

세계문학전집

해가 뿌옇게 평소보다 조금 넓은 동그라미로 동쪽 하늘에 놓여 있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구름이 길게 그어져 있다. 못 된 반 친구가 얼굴을 할퀸 것처럼.


엄마는 무릎 위로 올라오는 가죽 치마를 입고 검은 스타킹에 앞코가 뾰족한 구두를 신었다. 마지막으로 손에 들고 있던 더블 재킷을 걸쳤다. 한 손에 신발장 옆에 놓아두었던 사각진 브라운색 가죽가방까지 들고나니 영락없는 커리어우먼이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없이 우리 다섯 식구만 한집에 사는 건 난생처음이었다. 엄마가 된장을 퍼올 바가지 대신 가죽가방을 들고 현관문을 나간 것도 처음이었다. 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우리집에서 노인이 사라졌다. 단독주택은 해가 질 때까지 마루가 밝았다. 왠지 어색한 기분이 들어 어깨를 추어올렸다.


엄마는 세계문학전집을 파는 일을 시작했다고 했다. 엄마는 꽤 많은 사람들에게 전집을 팔았다. 한 질에 수십 만 원짜리 책이 안방에 책장과 함께 들어왔다. 반질반질하게 책 등을 보이며 가지런히 꽂혀있었다. 전집만 들어가게 짜인 책꽂이는 다른 책장에 꽂힌 불쑥 튀어나오고 크기가 제각각 다른 책들과는 달라 보였다.

엄마는 아주 교양 있고 멋진 걸 판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엄마는 독서가 마음의 양식이라고 했다. 우리 세 자매는 책은 원 없이 읽으며 컸다. 제인에어. 폭풍의 언덕. 테스. 여자의 일생. 그 전집에는 없는 고전이 없었다. 한 권 한 권 정복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엄마는 참 멋있었다. 전집을 다 읽은 것도 아니지만 책에 나오는 여자들처럼 주체적인 삶을 사는 것 같아 보였다. 알고 보면 짧은 사회생활의 요약본이었지만. 엄마가 알만한 사람들이 책을 사고, 팔 곳은 점점 줄어들었다. 엄마는 끝까지 우아하게 머리를 빗고 드라이를 하고 구두를 신고 매일 나갔다 들어왔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 엄마의 손길이 덜 필요해진 우리는 양파링과 새우깡 가루가 묻은 손으로 책장을 넘겼다. 미모지 여백에 기름 손자국이 한 장, 한 장 찍혀 있었다. 저녁으로 오뚜기 미트볼과 함박스테이크를 끓는 물에 데워 밥을 비벼 먹었다. 짭짤하고 기름진 미트볼은 입안에서 몇 번 씹으면 사라졌다.


나는 학교만 갔다 오면 온종일 안방에 배를 깔고 누워 전집을 읽었다. 꿈과 사랑. 남자와 배신. 여자의 비극, 신과 은총.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세련된 거라 믿으면서.

할머니가 벽을 보고 읊던 남묘호랑개교는 잊혀졌다. 모든 것이 갑자기 변해갔다. 원래 없던 자리처럼 누군가의 빈자리는 금세 채워졌다. 애도의 시간 후에는 모두 잊혀졌다. 나는 할머니도 없고 엄마도 없는 자리를 책으로 채웠다.


우리가 레토르트 음식에 물릴 때쯤 엄마의 짧은 사회생활도 끝이 나버렸다. 아빠는 어느 날 우리 세 자매를 불러 앉히고는 엄마가 쌍둥이를 가졌다고 했다. 엄마의 배는 하루가 다르게 불러오기 시작했다. 엄마가 안방에 누워있는 집에서 나는 점점 더 빠르게 책을 읽었다.




이전 08화 피아노와 된장찌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