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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 내는 법을 배우는 중입니다

by 김분주


나는 ‘일머리’가 없는 사람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일머리’란, 일은 적당히 하고, 티는 겁나게 내며, 인정은 확실하게 받아내는 능력을 말한다.

나는 일을 더 줘도 티내지 않고, 반대로 일을 잘해도 굳이 생색내지 않는다. 그게 미덕이라 생각했다. 물론 가끔 서운할 때도 있다. ‘이 정도면 알아주겠지’ 싶은데, 아무도 몰라준다. 그래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는 타입이다. 근데 사회생활이 길어지니까 알게 됐다.


아, 티 안 내면 진짜 아무도 모르는구나.


그냥 진짜, 아무도. 전혀 모른다. 예컨대 몇 주동안 내가 맡은 영어 수업에서 학생들 성적을 올리고 학원을 재미있게 다니게 하기 위해 꽤 공을 들였다. 아이들과 친해지기 위해 일부러 눈높이를 맞추고, 각개전투의 낮은 자세로 다가갔다. 아이들 앞에서 일부러 웃긴 행동을 해서 비위를 맞출 때면 가끔 현타가 왔지만, 카드값이 무서워 정말 열심히 샤바샤바 해줬다. 하지만 학부모 상담할 때, 나는 그런 얘기를 일절 안 한다. 괜히 생색내는 것 같고, ‘말 안 해도 당신의 자녀를 위한 나의 굽신 굽신을 알아주겠지’ 싶었으니까.


그러던 중, 학부모가 된 친구 J와 수다를 떨다가 이런 얘길 들었다.


“그런 거, 안 말하면 몰라. 집에서는 선생님이 애한테 뭐 해주는지 전혀 감이 안 와.”


그으래? 그렇단 말이지?

말해야 되는 거였어?

나는 칭찬받고 싶은 게 아니다. 다만, 내가 아이를 얼마나 진심으로 생각하는지, 그 마음이 전달되길 바랄 뿐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학원을 그만두지 않고 오래 다니게 하고 싶은, 그 진심 하나로— 처음으로, 진짜 처음으로—티를 내보기로 했다. 평소 나답지 않게, 학부모님들께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물론 프로그램 상 복사하기 붙여 넣기로, 아이들의 이름만 바꿔 보낸 똑같은 내용이었지만 내겐 큰 결심이었다.


내용은 대충 이렇다:


[OO학원]

안녕하세요, Jason 학부모님.

내일은 리딩 수업이 예정되어 있어, 꼭 교재를 챙겨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최근 Jason은 수업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발표도 성실히 해주고 있고, 과제도 빠짐없이 잘해오고 있어 학원 내에서 많은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수업을 즐기고, 스스로도 성취감을 느끼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Jason이 계속해서 즐겁고 의미 있게 배워나갈 수 있도록, 저와 원어민 선생님 모두 진심을 다해 지도하겠습니다. 항상 믿고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똥꼬 빠는 알랑방구 같은 문장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이어졌지만, 나름의 전략이었다.


'내가 당신의 아이와 영어실력을 위해 똥꼬 빨고 있으니 안심하세요.'


.... 를 은은하게, 세련되게, 부담스럽지 않게 티 내는 목적이었다.
이 정도면 아이들을 학원에서 잘 케어하고 있다는 걸 살짝 티 내는 내용이라 생각했다. 학원에서 컴퓨터로 문자를 보내면 학부모들이 학원 전화기로 문자 답을 할 수 있는데, 대부분은 답장을 안 하지만, 아주 가끔은 [네~] 나 [알겠습니다~]로 답이 올 때가 있다. 보내고 나서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내 진심이 잘 닿았을까?
너무 오바했나?


아, 그냥 보내지 말걸…

그런데!

문자 보낸 지 딱 2분 만에 한 학부모에게서 답장이 왔다.


두근두근.
과연 어떤 따뜻한 말이 돌아올까?

어떤 학부모님이, 나의 정성에, 어떤 답장을 하셨을까?



그 입 종료하세요.

마침표 하나로 느껴지는 무언의 그 입 다무세요.




예예 알겠습니다.

Leo 어머님.



스승의 은혜는 문자로는 전송되지 않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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