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아빠가 연세가 듦에 따라, 두 분이 다투는 이유는 정말 다양하다. 가끔은 그냥 서로의 숨이 붙어있다는 이유만으로 갑자기 불쾌해지기 까지도 한다. 말 그대로, 그냥 존재한다는 이유로. 그중에서도 최근 몇 달 동안 가장 자주 터지는 싸움의 불씨는 바로 원산지 문제다. 특히나 아빠가 여성호르몬이 분비되는 노년에 접어들면서 부쩍 집안 살림에 관심이 많아졌다. 마트나 시장에 가는 걸 좋아하는 아빠는, 눈에 보이거나 먹고 싶은 식재료를 사서 집에 들어오는데 엄마는 그런 아빠의 행동을 너무 마음에 안 들어하신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아빠가 사 오는 것들은 대부분이 중국산이 때문이다. 물론 중국산이라고 다 나쁜 건 아니지만 엄마는 '국산' 또는 '국내산'에 대한 강박적 신념을 가지고 있다.
'싸고 양 많으면 최고'라는 다다익선의 철학을 가진 아빠와, '하나를 사더라도 비싸고 질 좋은 게 낫다'는 오마카세 마인드의 엄마. 둘이 부딪히지 않을 수가 없다. 아빠는 엄마를 향해 “맨날 혓바닥만 처 놀리고 아무것도 안 사 오는 여편네”라 하고, 엄마는 아빠를 “값싸면 마누라도 중국산으로 바꿔올 양반”이라며 혀를 찬다. 정말 칼과 방패 사이 같다.
하루는 엄마에게 전화했더니 집안 분위기가 냉랭했다.
이유를 물으니, 또 한 판 붙으셨단다.
이유인즉, 아빠가 마트에서 깐 마늘을 사 왔는데 좋디 좋은 국산 마늘이 천지삐까리에 널렸는데 하필 중국산 마늘을 사 왔다고 아빠에게 한소리 했다고 한다. 다혈질의 성격인 경상도 남자 김 씨는 안 좋은 소리도 한두 번이라며 그만하라고 버럭 댔다가 1년 전, 5년 전... 마치 연어가 기억을 따라 강을 거슬러 올라가듯, 엄마가 악마소환술 하듯 몇 년 전 사건들이 줄줄이 끄집어 내기 시작했다. 몇 년 전에 산 중국산 믹서기 때문에, 생당근 대신 믹서기 날이 갈린 이야기를 끄집어냈다가 결국 아빠의 다혈질 버튼을 눌러버렸다. 화가난 아빠는 오른손에 쥔 깐 마늘 2kg를 냅다 거실 바닥에 내려 꽂아버렸다.
에에에 에ㅔㅔㅔㅔㅔㅔㅔ잇
깐 마늘을 다진 마늘로 다져버리는 강직구 내동댕이.
노오란 옥수수알이 꼬소한 냄새를 풍기며 퐝-터진 팝콘처럼, 아빠의 강직구에 바루 바닥으로 내팽개쳐진 깐 마늘은 땅바닥에 부디치자마자 온 사방으로 튕겨져 버렸다. 그리고 안방 문을 격하게 닫고는 그날 저녁까지 굶은 채 방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거실 소파에서 잠을 자는 엄마는, 밤새 이곳저곳 흩어져있는 마늘의 냄새를 맡으며 오늘 밤에는 드라큘라도 우리 집은 피해 가겠다며 낄낄댔다고 한다. 대단해 정말. 다음 날, 아침이 돼도 안방에 인기척이 없자 엄마는 살며시 안방 문을 열고, 심장질환이 있는 아빠가 걱정되서 누워있는 아빠 콧구멍에 손을 살짝 대보고는 숨은 쉬고 있는지 확인한 후에야 문을 조용히 닫고, 이삭 줍기를 하듯 바닥에 떨어진 마늘 주웠다고 한다. 마늘보다 더 많이 흩어진 건 아빠의 중국산 자존심이었지 않을까?
그 일이 있은지 한 달 정도가 흘렀고 아빠는 엄마와 식사를 하던 중 아빠가 뜬금포로 김치 이야기를 꺼냈다. 며칠 전 지인들과 갔었던 식당에서 나온 맛김치가 너무 맛있었다며 김치는 자고로 그렇게 담가야 입맛이 싸악 돌아서 딴 반찬 없이도 밥 한 공기는 뚝딱이라며 엄마에게 훈수를 두었다. 곧 70을 앞둔 엄마는, 듣기 싫은 소리를 들으면 꼭 4배로 되갚아주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는데, 지금 아빠 나이에 집에서 밥을 세끼를 먹는 건 죄 중에서도 악죄이고, 아빠를 가르쳐 김씨 세끼... 라고 손흥민의 화려한 드리블 실력만큼이나 현란하게 혓바닥 드리블을 하며 아빠를 코너로 몰았다. 식당 김치는 다 중국산이고 사카린을 을매나 많이 넣었으면 맛있게 느껴지나며 사이버 렉카 수준으로 증거도 없이 중국산 김치에 대한 맹렬한 비난을 쏟아부었다. 아빠는 엄마를 향해 대단한 아가리 독립운동가 납셨다고 말했지만 잔뜩 흥분한 엄마의 귀에는 안 들렸나 보다.
만드는 과정부터 시작해서 들어가는 재료, 유통되는 과정 등등등 출처 불명의 괴담들까지— 엄마는 김치유통학 박사처럼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를 줄줄 쏟아내며 아빠의 입에서 더 이상 '김치'라는 단어가 나오지 못하게 단단히 단도리를 쳤다. 왜 중국산이 가격이 저렴하고 국산이 비싼 건지 아직도 모르겠냐며 아빠를 훈계했는데, 가만히 듣고만 있던 아빠가 어차피 윗구멍으로 들어가서 밑구멍으로 나오는 건 중국산이나 국산이나 같다며, 장기는 국가를 따지지 않는다 고함을 지르고는 안방으로 다시 휑하니 들어가셨다고 한다. 그리고 엄마는 다음날 또 아빠 콧구멍에 손을 대보고 살아있음을 확인한 후에야 소파에 드러누워 티브이를 틀었다고 한다.
얼마 전, 아빠는 또 마트에서 세일하는 삼겹살을 보고 소주 한 잔이 간절해서 유럽 어디쯤, 벨기에였나 스페인이었나 어쨌든 외국산 삼겹살 1000그람을 사 왔다. 외국산을 사온것에 엄마가 뭐라 할까봐 아빠는 애초에, 유럽산이나 한국산이나 어차피 죽은 돼지들이 같은 천국에 가는건 매한가지라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했다고 한다. 이미 그것부터가 마음에 안 든 엄마는 한소리 하려고 했으나 요즘 아빠가 기운도 없고 풀이 많이 죽은 것 같다며 그냥 두자고 생각해서 나름 정성껏 파조리도 하고, 쌈야채도 준비하고 초라하지만 거하게 한상 준비해줬다고 한다.
한껏 달궈진 가스버너에 고기를 올리자 지글지글 맛있는 소리와 함께 꼬소한 냄새가 거실을 진동하고 잔뜩 들떠있는 아빠를 보며 오늘 하루는 유럽산이든 북한산이든 그냥 넘어가자고 생각했다. 삼겹살이 적절하게 노릇하게 익고 두 분이서 첫 한입을 딱 먹는 순간! 입한 가득! 돼지고기 누린내가 혓바닥 돌기를 후쳐쳤다고 했다. 엄마 표현에 의하면 입 안에 들어온 건 삼겹살이 아니라, 유럽 돼지의 고단한 삶의 냄새였다고 한다. 엄마는 특히나 고기에서 나는 냄새를 귀신같이 알아내는 진돗개급 후각을 가지고 있는데 도저히 이건 아빠에게 잔소리를 안 하고 넘어갈 수 없다고 생각해서, 한마디를 하려고 하려고 아빠를 쳐다봤는데,
존맛탱.
유럽산 돼지가 내 입에서 샤르륵 녹네.
너무 행복한 아빠를 보니 차마 아무 말 못 했다고 한다. 나는 그 삼겹살을 먹어보지 않아서 정말로 누린내가 났는지는 알 수 없다. 아빠도 사실 냄새를 맡았지만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그냥 맛있다고 한 건지도. 그렇게 아빠는 고기 한 점에 행복을 씹었고, 엄마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아빠를 씹었다. 그날 엄마가 쌈장에 찍은 건 고기가 아니라 참을 인(忍)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 두 분은… 진짜 잘 싸운다.
그리고 또, 정말 잘 산다.
천생연분인가 보다.
끗
+
최근 날씨가 많이 더워져서 부모님께 시원하게 드시라고 생메밀면을 주문해 드렸다. 그런데 생각보다 배송이 늦어지자, 엄마가 직접 배송조회를 눌러보셨다. 그걸 보고는 바로 나에게 전화해 다짜고짜 간편식 메밀면 세트라면서, 왜 굳이 중국에서 주문했냐며 엄청 뭐라 하셨다. 전통 방식으로 만든 메밀면인데, 혹시 개발하신 분이 중국 분인가싶어 얼른 배송조회를 확인해 봤다.
동서울우체국집중국
.............?
고갱님, 많이 놀라셨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