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H와 함께 소고기 국밥 전문점에 체험단으로 음식점에 다녀왔다. 솔직히 더운 날씨에는 잘 어울리는 메뉴는 아니었지만, ‘이열치열’이라며 아침까지 굶고 기대에 부풀어 찾아갔다. 주문을 하고 음식이 나오기 전, H와 나는 식당 이곳저곳을 지문 감식반처럼 샅샅이 훑으며 사진을 찍는다. 구석구석, 각도별로 찍다 보면 어느새 사진이 200장 가까이 된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찍어도 H가 블로그에 올리는 건 고작 20장 남짓. 나머지는 전부 탈락이다. 우리는 늘 진심이기에 허황된 맛집 인플루언서를 꿈꾸며 우린 언제나 최선을 다한다. 일단 내부 사진을 다 찍고 나면, 또다시 2차적으로 음식 촬영 시작을 시작한다. 음식 전체샷부터 동영상, 클로즈업, 반찬 단독샷까지… 한 100장쯤 더 찍는다.
한참을 찍고 나서야 우리는 카메라를 내려놓고 밥을 먹기 시작한다. 몇 번 체험단을 하다 보니 이제는 요령도 생겨서, 처음에만 열심히 찍고 나면 그다음은 편하게 즐긴다. 이상하게도 이날 따라, H가 앞치마를 한 내 상반신 사진이 필요하다고 해서 식당에서 제공해주는 앞치마를 마지못해 착용했다. 나는 평소에 음식을 먹을 때 흘리거나 옷에 묻히는 스타일이 아니라 앞치마를 잘 안 하는 편인데 블로그에 필요하다고 하니 울며 겨자먹기로 입었다. 사실상 앞치마라기보단 거의 턱받이에 가까워서 그걸 입은 모습이 내 모습이 너무 웃겨서 한참을 깔깔댔다. H와 마주 앉아 맛있게 식사하며 수다를 떨고 있는데, 누군가 우리 테이블 옆에 다가와 반가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어? 분주야, 오랜만이다아아아ㅏ!"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들었는데, 세상에 마상에. 사진 동호회에서 알고 지낸 J가 서 있었다.J는 코로나 이전, 주말마다 사진 동호회 야외 출사에서 늘 만났던 사람이다. 뚜벅이인 나를 차로 데려다주기도 했고, 선배라는 명목 하에 사진 찍는 팁도 이것저것 알려줬다. 그리고… 내가 잠시 마음을 품었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땐 우리 둘 다 솔로로로로롤이었고, 혹시 잘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살짝 기대했었다. 하지만 그는 정말 말 그대로, 사진만 찍으러 나오는 정직한 사람이었다. 나에게 특별한 호감을 보인 적이 없어 나도 조용히 마음을 접었다. 물론,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간 것도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그가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주길, 핑크 시그널을 보내주길 내심 바랐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 동호회는 흐지부지 흩어졌고, 내가 퇴사를 하고 잠시 부산을 떠나면서 동호회 사람들과도, 그와도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렇게 끝난 줄로만 알았는데— 이런 데서,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
그는 주말이라 회색 후드티에 반바지를 입은 편안한 차림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분위기는 예전보다 훨씬 단단해 보였다. 헝클어진 머릿결도, 자연스럽게 웃는 얼굴도 어쩐지 여유로웠다.
개멋져.
갖고싶다 이 남자.
예전엔 선이 고운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그 선에 깊이와 힘이 더해진 느낌이었다.
4년 전에도 멋졌지만,
지금은 그냥 더 좋아 보였다.
그에 비해서 나는,
아 응애예요.
마치 내가 입고 온 원피스로 보이겠지만, 아닙니다.
턱받이를 한 채 국밥 앞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이, 이렇게나 처참할 줄은 몰랐다. 하필 또 날이 더워서 땀을 비오듯 흘리며 처묵처묵 하던 모습이라니. 사진을 찍느냐 식어버린 국밥을 급하게 먹다 보니 그의 앞에서 구강 체크도 못 했지만 국산 고춧가루를 쓴다고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장님의 자존심만큼이나 내 이빨에 붙은 고추가루는 붉게 타올랐을것이다. 한껏 예쁘게 차려입고 전 남자친구 앞에 우아하게 등장하는 드라마 속 전여친처럼 되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오랜만에 만난 그의 앞에 난 지금… 고춧가루가 이에 낀 채 공짜밥 먹는 체험단일 뿐이었다. 아직 시작도 안 한 썸인데 벌써 정 떨어지기 딱 좋은 비주얼이었다.
씨이이이ㅣㅣㅣ바바아아알.
이 와중에 국밥은 또 왜이리 맛있냐.
접시물에 코박고 죽는다는 말이 있듯, 그날 나는 국밥 앞에 코를 박고 숨을 죽였다.
부끄러움이 국물보다 뜨거웠고, 자존심은 국밥에 든 고기처럼 푹 익어버렸다.
그는 민망해 하던 나를 위해 자기 일행이 기다리고 있고, 내 일행도 있으니 일단 오늘은 가보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다음에 시간 내서 차 한잔 하자며 짧은 만남을 마무리하려 했다. 그리고는 오랜만에 만났으니 우리 밥값을 자기가 계산하겠다며 우리 테이블 계산서를 들고 가려는 제스처를 취했다..
아ㅏㅏㅏㅏ 안ㄴ돼
우린 체험단이라 음식이 공짜라구여ㅕㅕㅕㅕ
....라고 차마 그에게 말하지 못했다.
퍼스털 칼라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연핑크색 앞치마를 턱받이처럼 하고 앉아 땀 흘리며 국밥 먹는 내 모습만으로도 이미 부끄러운데, 여기에 공짜 밥까지 더해지면… 그냥 그 순간, 체험단이라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부끄러운 일이 아닌데도, 그 조합이 너무 처절하게 느껴졌달까. 마지막 자존심 같은 거였다.
한사코 거절하는 나를 뒤로하고, 그가 냅다 계산하러 가려는 손에서 재빨리 계산서를 낚아챘다. 고춧가루가 보일까 한껏 입술을 오무린채 '오능은 칭구가 붕평해하닝 당음에 맛잇능 거 사ㅏㅏ주세ㅇㅇㅕ'라 애원하듯 말하자, 그는 멋쩍은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맛있는 거 사줄게. 만날 이유가 생겼으니, 곧 봐야겠네."
어쩜 대사가 저렇게 섹시할까. 그는 아이돌 같은 건치 미소를 한 번 날리고는 조만간 연락하겠다며 가게를 나갔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 진땀을 흘리고 있는 나를 향해 H가 조용히 나를 위로하며 말했다.
나는 체험단이다.
나는 공짜밥 먹으러 왔다.
왜 말을 못 하냐고 낄낄낄.
그러고는 한참을 배를 잡고 처 웃고 있는 H의 주둥아리를 보니 친구지만 한대치고 싶다는 충동이 밀려왔다.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전혀 생각하지 못한 사람을 만나다니,
2025년 하반기에는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는 사주가 맞긴 맞나보다 보다.
혹시 연애운일까? 그와 인연이 이걸 다시 시작으로 이어지는 걸까?
혼자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친구에게 헛소리를 하며 히죽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아참,
우리 서로 연락처 없잖아.
씨이ㅣㅣ발 말 뿐이었네.
연락처도 없는데 뭘 만나자는 거야,
텔레파시야 뭐야?
그렇게 우리의 인연은 국밥처럼 짜게 식어갔다.
끗
+
올해 운세에 좋은 일이 찾아온다고 하던데, 사주가 말해주듯
저에게도 뜻깊은 소식이 있습니다.
곧 출간합니다요요요오오옹
많은 관심부탁드립니다. 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