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일기
선물, 아버지의 여름
두 달이 돼간다.
밤마다 새벽마다 손톱을 세우곤 하는 날이.
덕분에 문득문득 아버지를 떠올리는 순간들이 많다.
사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어쩌면 살뜰하게 대해주었다는 기억이 없기에 '별로 없다'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서른여덟에 돌아가셨다. 요즘 같으면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을 나이거나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을, 젊은이 소리를 한창 들을 나이에 늙으신 어머니와 당신 보다 두 살 아래의 아내와 올망졸망한 아이 넷을 두고 저세상으로 서둘러 가셨다. 내 나이 열여섯이었다.
만으로는 열다섯, 엄마 뱃속을 나오던 때가 늦가을이니 대충 헤아려도 십사 년이 안 된다.
아버지는, '노래를 잘했다. 사람 좋다는 소리를 들었다. 멋쟁이다. 술을 좋아했다. 우스개 소리를 잘했다.' 이런 말은 친척들로부터 들은 말이다.
'여자를 좋아했다. 일하기 싫어했다. 애들에게 인정머리가 없었다. 어머니(할머니)와 툭하면 부딪쳤다. 죽는 날까지 술밖에 몰랐다. 돈을 번 적이 없다. 한평생 편하게 살다 갔다.' 어머니로부터 들은 말이다.
내가 뚜렷이 아는 건 '술을 좋아했다.' 뿐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으셨다. 좋지 않고 싶어 그러셨던 건 아닌 듯하나 할머니의 간섭, 적확하게는 할머니로부터 가스라이팅이 남편을 데면데면하게 만든 듯하다.
아버지는 살뜰한 사람인 듯한데 가스라이팅 당한 아내가 데면데면하니 밖으로만 돌았고, 할머니는 아버지가 세상에 둘도 없는 아들이었던지 아들에 관해서는 모든 걸 다 알아야 했고 다 관여해야만 했던 듯하다. 며느리는 살림해 주고 자식 낳아주는 존재로만 여겼는지 당신 아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걸 은근히 막았고, 대놓고 눈치를 주며 감시를 했다고 짐작한다.
이를테면, 아침진지를 드시면 마실을 다녀와서는 "에구, 누구 집 아들 며느리는 으른들이 있는데도 붙어 앉아 손을 잡고 웃대. 으휴, 남사스러워라. 으휴, 남사스러워." 못 볼 걸 봤다는 듯 남의 집 아들 며느리가 사이좋은 걸 흉보니, 그렇게 하지 말라는가보다 짐작하고는 남편이 바깥에 갔다가 돌아오면, 잘 다녀왔냐 인사는커녕 멀찌감치서 고개를 돌리고 있다가 물을 건네도 고개를 돌리고 건넸단다.
어머니 기억 속 아버지는, 여름철 한두 달은 빛이 들어오지 않고 불기운도 없는 도장방에 겉껍데기를 벗긴 볏짚을 깔고 속옷도 못 입고 진물이 흐르는 살갗의 열기를 다스렸다고 한다. 그 방을 드나드는 사람은 시어머니(할머니) 뿐이셨고, 때때로 밤나무껍질을 삶아 식힌 물을 가지고 들어가 진물 흐르는 살갗을 닦아 내면서 끼니를 챙겨 주셨단다. 그 방에서는 가끔 악을 쓰거나 짐승 울부짖는 듯한 괴성이 나왔고 그럴 때마다 무서웠단다. 심하지 않을 때는 베옷을 입고 툭하면 양팔을 벌리고 있었고, 평생 (소여물 끓일) 쇠꼴을 한 번도 베지 않았기에 쇠꼴을 베어 오는 건 늙으신 시아버지(할아버지) 몫이었단다.
할아버지는 내가 열 살 무렵에 돌아가셨으니 며느리(어머니)가 들어왔을 때 이미 여든 중반이셨다. 그럼에도 느지막이 얻은 아들이 햇빛이나 풀을 가까이할 수 없는 고급병(?)을 타고났으니 돌아가실 때까지 꼴짐을 지셨던 듯하다.
'안 하셨던 게 아니라 못하셨겠네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불긋불긋 거뭇거뭇 얼룩덜룩한 목을 가리면서 가까운 이들에게, "아버지가 주신 선물이에요. 일찍 가시면서 당신 잊지 말고 생각해 달라고. 덕분에 사시사철 가끔 생각했는데 올여름은 한순간도 잊지 못하고 있네요." 겸연쩍음이 섞인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왔다. 해마다 여름마다. 삼복더위쯤에는 몇 차례 여기저기 가렵고 부풀어 오르고 진물이 나기도 하는 일을.
그러나..., 해마다 겪는 일이긴 했지만 올해처럼 오랫동안은 아니었고 이토록 심하진 않았다.
기후 위기로 올여름은 유난히 뜨겁고 후덥지근이다. 그런가 보다 하면서 아침 일찍부터 저녁때까지 사나흘 바쁘게 움직였다. 썬크림을 바르지도 않았고 토시도 하지 않은 팔뚝에는 좁쌀보다 작은 두드러기가 돋았고, 목덜미나 뺨이 가려워지는 몇 번의 신호가 오긴 했지만 무시했다. 늘 그랬고 그때마다 저녁에 잘 씻은 뒤 진정제를 바르면 나아졌고 그런대로 견딜만했다.
그러나 올여름은 잘 씻고 진정제를 발라도 가라앉질 않고 점점 더 가려워졌다. 알고 있는 진정법을 다 동원했다. 누군가에게 선물 받은 소금정제수를 바르기도 했고, 진정효과가 있다는 천연 기름을 바르고 한밤중부터 아침까지 얼음주머니의 도움을 받거나 선풍기 바람에 날려버리겠다는 듯 애를 썼지만 효과가 별로 없고 점점 벌겋게 부풀어 오르고 넓게 번져갔다.
'한 잠 자고 나면 괜찮겠지!' 어찌저찌 설핏 잠들었으나 몇 번씩 깨야만 하는, 몸은 잠이 들러붙어 바닥에 붙어있으나 손가락과 손톱은 활짝 깨어 턱 밑으로 목울대로 바쁘게 오가면서 극렬하게 벅벅벅 긁는 일이 밤마다 일어났다.
심할 때는 귀 밑으로 가래톳이 서서 아프기까지 했으나 긁는 걸 멈출 수는 없는 밤이 어어졌다.
가려움은 참으로 참기 힘들다. 차라리 아픈 게 낫다 싶을 정도로. 게다가 올여름의 가려움은 진화하여 따가우면서 가렵다. 한밤중이나 새벽에 잠을 깨우는 가려움이 특히 그렇다. 마치 따끔따끔하게 쏘는 쐐기 벌레 수십 마리가 쉴새 없이 쏘면서 돌아다니는 듯 말이다. 그런 밤이나 새벽엔 목울대살을 죄다 뜯어내고 싶다는 생각이 잠결이 맞나 싶을 정도로 불쑥불쑥 올라오곤 했다. 손톱이 길지 않은데도 열이 나면서 진물이 나는 목울대는, 잠결에 긁는 힘까지 더해져 긁어대니 살갗이 벗겨진다. 약을 바른 생살이 꾸덕꾸덕해질 때는 조금만 움직여도 말라가던 앏은 막이 찢어지면서 또 다른 아픔이 따라왔다.
따끔따끔 가렵고 아픈 건 건 둘째치고 잠을 푹 못 자니 낮에도 몽롱하고 머리가 띵, 비몽사몽이다.
일주일 넘게 버티다가 잠을 푹 자고 싶다는 욕심에 잠들기 전 알레르기 약을 먹었다.
두 해 전 평창읍에 볼일이 있어 운전은 남에게 부탁하고 허리 복대를 하고 누워서 갔다. 볼일을 끝내고는 이왕 간 김에 지인들 얼굴도 보자는 마음에 흔들림과 방지턱의 충격에 대비하느라 허리를 죄고 있는 복대를 네 시간 만에 풀었는데..., 그날 밤 복대를 한만큼의 배와 옆구리와 등에 밧줄 감아놓은 듯 두드러기가 일더니 나중에는 눈동자까지 가려워졌다. 피부약을 먹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사실 피부약은, 먹으면 가려움증은 가라앉지만 속이 쓰려 웬만하면 먹지 않는데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여 잘 갈무려 두었고, 잠을 자고 싶다는 욕심이 한 알 먹게 했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웬걸, 그날 밤 목울대를 비롯한 여기저기의 두드러기는 몇 배 더 심하게 일어났고, 가려움과 따가움 또한 몇 배 더 세게 파고들었다. 턱 밑엔 가래톳이 섰고 붉게 부풀어 오름은 목덜미까지 퍼져가고 있었다.
햇빛, 금속, 조임, 화학, 파스, 풀..., 그동안 살아오면서 겪었던 알레르기 현상이 모두 들고일어나는가 보다. 몸뚱이 여기저기 고양이 발바닥만 했던 얼룩은 어느새 개 발바닥 크기로 커져있고, 눈썹 크기는 콩깍지만 해졌으나...,
오늘, 지금은 많이 가라앉아있다.
아버지가 주고 가신 선물! 사실 나도 모르게 받긴 했지만 면역력이 좋으면 굳이 경험 안 해도 되는 선물이다. 그러나 3년 전 기어 다닐 정도로 아프고 난 뒤에 떨어진 면역력 때문에 삐걱거리는 몸뚱이는 걸핏하면 경고를 해대는데, 여전히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버릇처럼 해오던 일을 툭 내려놓지 못하는 것도 모자라 조금 좋아진 걸 완전 좋아진 걸로 착각하고는 조자룡 헌 칼 쓰듯 기운을 써댔으니...,
우리 몸은 60조(兆)의 세포로 이루어졌으며, 그 가운데 400개 정도는 명의(名醫) 세포라고 한다. 치유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명의 세포 가운데 소마티드라는 적혈구 백혈구보다도 작은 면역력 세포는 영양제나 약이 들어오면 할 일이 없다고 여겨 게으름을 피우다가 끝내는 어느 구석으로 들어가 잠을 잔단다. 그때부터 우리 몸은 방전 상태가 되지만 만성 피로라 여기며 피곤하다는 말을 늘 달고 살아야 한다.
전기제품은 전기가 없거나 충전이 안 되면 쓸 수 없다는 걸 전기제품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일이다. 그렇듯 몸을 활발히 움직이게 하는 내 몸 안의 음전자는 방전 상태라 온갖 가려움증을 부추기고 있다.
밤새 벌겋게 부어오른 목울대를 얼음주머니로 달래다가 응급 충전을 하러 간다. 1시간 동안 엄마 뱃속의 양수와 같은 소마티드볼 안에 풍덩 들어가 가려움과 따가움을 가라앉힌다. 가려움증 뿌리를 완전히 뽑아내려면 충전을 자주자주 하면서 먹고 자고 먹고 자고만 해야 한다는데, 조금 나아지면 그새를 못 참고 풀 몇 포기 뽑다가 다시 또 두드러기를 불러오기를 몇 차례 거듭했다.
가장 노릇을, 아버지 노릇을, 남편 노릇을, 자식 노릇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돌아가시는 날까지 미워했던 아버지...!
올여름, '아버지의 여름'을 경험하면서 아버지의 삶을 다시 생각해 본다. 그리고 아버지가 겪었던 힘듦을 오롯이 느껴본다.
'얼마나 힘드셨을까!'
1970년 80대의 평창 산골의 여름 기온은 지금처럼 높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한여름엔 바람이 걸림 없이 지나칠 수 있는 삼베옷을 입어야 할 만큼 더웠던 그때,
선풍기는커녕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그때, 변변한 약도 없던 그때, 꼴을 베고 싶어도 베고 난 뒤의 결과 때문에 늙으신 아버지가 꼴짐을 지고 오시는 걸 보고 있어야 하는 심정, 멀찌감치서 풀만 보아도 두드러기가 온몸을 덮고 햇빛만 쐬어도 두드러기가 나는 난치병(難治病)을 해마다 겪어야 하셨을 아버지...!
지지난해 보다 더 심하고 더 오랫동안 머물고 있으나 배려해 주는 벗이 있고, 에어컨이 있어 시원하게 지낼 수 있고, 선풍기가 약을 바른 뒤 금방 말릴 수 있고, 두드러기에 바를 좋은 약이 있고, 금방 가라앉힐 수 있는 충전소가 가까이에 있는 좋은 세상에 살고 있는 나는, 변변한 것 아무것도 없는 시절에 아버지가 겪은 일에 견주면 고생도 아니리라.
올여름은, 아버지의 여름을 겪으면서 기후 위기의 심각함까지 느끼는 아주 특별한 여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