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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여행의 참 맛을 알려면

인도 기차를 타보고 싶다던 벗에게 - 2

by 버폐


수진, 내 기억에는 우리나라 기차 안 통로는 제법 넓었다는 느낌인데 그렇지 않아?

너도 알겠지만 군입질거리를 팔러 다니는 사람들이 구르마를 끌었고 그 안에는 과자, 물, 음료, 맥주, 안주..., 웬만한 것들이 다 있었던 것 같아. 그치?

그러나 이곳엔 짜이 파는 사람, 물 파는 사람, 과자 파는 사람, 도시락 파는 사람이 저마다 달라.

짜이 파는 사람은 한 손엔 보온병이나 주전자를, 또 한 손에는 물렁한 컵을 들고 다니고, 물 파는 사람은 양동이에 물병을 넣어서 들고 다녀. 과자든 도시락이든 과일이던 거의는 어깨에 메고 다녀. 그런데 그들이 지나다닐 때엔 다른 사람이 지나갈 수가 없어. 그만큼 좁다는 뜻이지.




수진, 우리 일행 가운데는 부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한창 뛰어다니며 놀 나이의 12살짜리 사내아이가 있어. 그러나 무슨 사연인지 잘 아는 사이도 아닌, 거의 할머니 할아버지뻘 큰아버지 고모 삼촌뻘 어른들과 여행(?)을 함께 하고 있어.

말이 여행이지 어른들 틈에 끼어 무척이나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거지. 그래서일까, (아이는) 틈틈이 그 아이만의 세상을 만들어 가곤 하는데 그 세상은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아니 이해하려 하질 않지. 그러다 보니 아이도 힘들고 어른들도 힘들어하는 순간들이 참 많아.

덕분에 내가 인도 성지 순례를 꿈꿀 때 일으킨 원(願)이 '스승을 만나게 해 달라' 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곤 해. 그 아이가 나의 스승으로 온 것 같거든.

매표소의 인도인이 가족이라고 믿었던 우리 일행

수진, '여행'하면, 흔히들 '다른 지역이나 다른 나라를 구경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잖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여행은 '자신을 만나는 일'이라고 생각해.

만약 내 마음대로 할 것 같으면 자신을 쉽게 만나지 못할 것 같아. 그런데 우리와 함께 하는 12살 그 아이를 보면서 알지 못했던 나를 보게 돼.

우리나라 불교에서 수련되지 않은 마음을 말할 때 '길들여지지 않은 망아지'에 빗대어 말하는데 그 아이는 아이답게 정말로 망아지 같거든.

그러기에 그 아이를 살피는 일이 곧 나를 살피는 일이라고 느낄 때가 참 많아. 그래서 고맙게 느껴질 때가 있지만 솔직히 말하면 안타까울 때가 더 많은 것도 사실이야.


산치 대탑

오늘은 '보팔'이라는 곳에서 '산치'를 다녀왔어. (2011년 1월 25일)

그곳은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 후 10세기까지 거의 400년에 거쳐 이루어진 탑과 사원이 있던 곳으로, 동서남북 쪽 문에 새겨진 부처님의 일대기가 참 아름답고 볼만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어.

또한 탑과 그림에 깃들어있는 사연도 참 재미있어. '정말 그랬을까!' 생각해 봤어.

산지탑에 새겨진 그림은 무불상(無佛像) 시대라 부처님의 형상을 표현하지 않고 연꽃이나 보리수, 발자취 또는 법륜으로 표현했고, 제자들과 아쇼카 왕의 일대기도 조각돼 있어.

아쇼카 왕은 인도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인물로 한 때는 인도 전역을 통일했던 왕이야. 경전에서 말하는 전륜성왕이지. 아쇼카는 크고 작은 나라들을 정복하러 다니면서 살생을 많이 했고 사연도 많이 만든 모양이야. 산치대탑에는 그런 일화가 조각으로 표현돼 있거든. 이야기는, 아쇼카가 왕자의 신분으로 정복 전쟁을 왔다가 '데비'라는 여인을 첫사랑으로 만나 살림을 차리고 아이들도 낳았나 봐.

아쇼카는 다른 지역으로 정복 전쟁을 하러 떠났고, 전국을 통일하고 왕도 되었지만 데비와 아들 딸을 잊었는지 데리러 올 생각을 하지 않은 모양이야.

데비는 아들에게 아쇼카가 남긴 정표를 주며 아버지를 만나러 가라고 했대. 자신이 준 정표를 들고 나타난 청년이 자신의 아들임을 알고 그의 어머니인 첫사랑을 만나러 갔지만..., 데비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거야.

아쇼카는 전국을 통일하면서 너무도 많은 사람을 죽이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했다는 알고 참회하면서 불교에 귀의하였는데 데비와의 인연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거지. 아쇼카는 아들의 소원으로 산치에 데비를 기리는 탑을 세웠대. 그리고 아들(마헨드라)과 딸(상가미따)을 출가시켜 스리랑카로 불법을 전하러 가게 했다더군. 남방불교의 시조가 되는 셈이지.


그동안 탔던 좋은 버스 안
바깥을 내다보며 전선으로 경적을 울리는 차장


수진, 내가 더 재미있다고 여긴 일은 돌아오는 버스 안이었어. 누군가 '기차를 타야 여행의 참맛을 불 수 있다'했는데 아니야, 버스도 그래.

우리는 거의 로컬 버스(local bus)를 타고 다녔는데 그동안 탔던 버스는 오늘 버스에 견주면 양반인 셈이라는 걸 오늘에서야 알았어.

오늘 탄 버스는 버스는 겉에서 보기에도 많이 낡았지만 들고 나는 문이 앞뒤로 있고 조수도 앞 뒤에 한 사람씩 있었어. 우리는 뒷문으로 탔는데, 바닥에서 버스로 오르는 곳의 높이는 얼마나 높던지 양쪽 난간을 손으로 잡고 있는 힘껏 힘을 주어 올라가야만 했어. 그렇게 힘들게(?) 올라간 버스 안은 이미 거의 꽉 차 있었어. 그러나 조수들이 사람들을 밀어붙이니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생겼고, 우리도 겨우 자리를 차지하고 앉을 수 있었어.

여행 살림을 맡은 이와 나는 맨 뒷자리에 앉았는데 그곳은 손잡이도 없고 드나드는 문 옆이라 자칫하면 떨어질 수 있는 조금은 위험한 자리였어. 만약 버스가 갑자기 서기라도 하면 그대로 쏠려 바깥으로 떨어질 판이라, 심하게 출렁일 때는 있는 힘을 다해 버텨야만 했거든.




그리고 전에 탔던 버스도 달랐지만 손님들도 달라 보였어. 사람의 몇 배가 되는 짐이 먼저 들어와 한 자리를 차지하기도 하고, 깔끔하게 차려입은 여학생이 타는가 하면 동냥 그릇을 들고 다 떨어진 옷을 입은 아이도 탔어. 그렇게 사람이 타면 저 앞에 있던 차장이 좁은 틈을 비집고 와서는 용케도 새로 탄 손님을 알아내고는 버스값을 받아가는 거야. 그 모습이 참으로 신기했어.

뿐만이 아니라, 뒤편에 있는 조수는 가느다란 전선줄을 쉴 새 없이 문 기둥에 살짝살짝 대곤 했는데 알고 보니 경적을 울리는 거였어. 그 조수는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앞을 보면서 쉼 없이 경적을 울렸는데 버스가 달리는 속도에 부딪쳐 오는 바람, 그 먼지바람을 죄다 맞으면서도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태연하게 씹는담배를 우물거리면서 손님을 태우고 밀어 넣고 경적을 울리더군. 게다가 틈만 나면 핸드폰을 켜고 앵앵거리는 음악까지 가장 크게 키운 소리로 틀어놓는 거야.

또 어느 정류장에서는 버스 지붕 위에 올려실었던 짐을 내리기 위해 재주넘기(곡예) 하듯 창문을 넘어 버스 지붕 위로 올라가 짐을 내리고 다시 창문으로 곡예하듯 들어와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거야. 달리는 버스에서 말이야.


우리나라의 6,70년대의 차장들도 그랬을까!

(다음 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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