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기차를 타보고 싶다던 벗에게 - 5
수진, 오늘은 조금 한가로운 날이라 조금은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어.
전에 기차에서 5루피를 준 이야기 한 것 기억나니?
그런데 기차에서 또 내 지갑을 열었어. 저번처럼 또 그런 서커스를 하는 아이들을 만났냐고? 아니야. 전혀 다른 결의 일로 열게 됐어.
그러니까 이번에는 뉴델리에서 바라나시까지 오는 기차 안이었는데 이 기차는 시작과 끝, 그러니까 출발역은 뉴델리고 도착역은 바라나시여서 아주 느긋하게(?) 있을 수 있었지.
인도 기차는 말이지 중간 어디쯤에서 내리려면 긴장을 해야 하거든. 그동안은 얼추 시간이 다 된 듯 여겨지면 "여기는 무슨 역인가요?" 초조해하면서 내릴 곳이 가까운지 멀었는지를 같은 칸에 탄 승객들에게 물어봐야 했거든.
인도는 대도시의 아주 큰 역이 아니면 안내방송이 없어. 중간에 손님들을 태우느라 멈출 역이 다가와도 우리나라처럼 미리 알려주질 않는다는 거야. 게다가 시간도 안 맞아. 연착이 흔한 일이란 말이지. 심하게는 몇 시간씩 늦어진다는 구만. 그러니 인도 사람들은 참 신기하고 대단하지? 역무원이 방송을 하지 않아도 내릴 곳을 어떻게 그리들 잘 아는지...,
그건 그렇고 어쩐 일로 지갑을 열었냐고?
이번은 출발역에서 타고 종착역에서 내릴 것이니 얼마나 느긋하게 있었는지 짐작이 갈 거야. 그런데 그렇게 느긋한 마음을 흔든 건 마지막 역을 남겨둔 어느 지점에서부터였어.
여덟아홉 살쯤 돼 보이는 아이가 저쪽에서부터 빗자루질을 하면서 오는 거야. 두 무릎을 세운 앉은 걸음으로. 아이는 가는 대나무 가지를 엮어 만든 듯 거칠고 뻣뻣한 빗자루로 사람들이 앉은 또는 앉았던 자리를 슥슥 쓸면서 말이야. 중간중간 사람이 있으면 쓰는 비질을 잠깐 멈추고 손을 내미는 거야. 그러면 점잖아 보이는 부인 또는 신사가 동전을 쥐어 줘. 아주 익숙한 일이라는 듯 아주 자연스럽게.
아이는 무릎걸음으로 내가 앉은자리까지 왔고, 나는 위층 침대에 있던 쓰레기 봉지를 내려놓으면서 5루피를 건네주었어. 달라고 손을 내밀기도 전에 말이야.
인도에 도착하는 날부터 지금까지(2달 남짓) 어린 아이고 어른이고 수없이 손을 벌리는 이들을 만났지만 쉽게 내 지갑은 열리지 않았어. 하지만 스스로 하는 노동의 대가로 손을 벌리는, 그렇다고 끈질기고 악착같이 달라고 하는 것도 아닌 그 아이는 그냥 달라는 이들과는 너무도 다르게 여겨졌기 때때문에 내 지갑이 쉽게 열렸던 거지. 이해되니? 난 앞으로도 그럴 거야.
우리나라에도 구걸하는 이들이 많지? 특히나 서울역처럼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곳은.
하지만 처음부터 구걸하는 業을 짓지는 않았을 거야. 어떤 까닭이 바탕이 되어 시작했던 것이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고, 그일 밖에는 할 게 없다 여기고..., 그래서 다시 하기를 거듭 되풀이하면서 굳어진 것인지도 모를 일이야. 나도 서울역이나 동서울 버스 터미널 앞에서 가끔 만나곤 하는데, 잿빛 옷을 입은 승려들은 그들의 업에 곧잘 휘말리곤 한다는 사실 알고 있니? 그들은 "자비를 베풀라."면서 다가오거든. 자비(慈悲)라는 말은 너도 알다시피 불교를 상징하는 대명사거든. 그러기에 승려들은 연민심으로(어쩌면 동정심?) 지갑을 열거든.
나도 그러곤 했는데 언젠가부터 지갑을 열지 않아. 열어도 몇 마디를 하고 열어.
그들이 그 업을 계속 짓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의 마음 곳간에 저장되어 언젠가는 작용하기를 바라면서 말이야. 그들은 익숙한 몸짓으로 "예, 예. 고맙습니다." 하면서 받는데 마음은 편치 않아.
그리고 말이 안 통할 것 같은, 그러니까 술이 취했다거나 정신이 흐려 보이는 이들은 아예 피하기도 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하면서.
수진, 한가한 시간을 핑계 삼아 그동안의 이야기를 할까 해. (인도 기차는 아직 한 번 더 타야 해.)
우리는 또 한 번 버스로 인도와 네팔의 국경을 넘었어. 국경 지역 소나울리에서 인도를 나가겠다는 허가를 이민국에서 몇 시간 기다렸다가 몇 걸음만 걸으면 네팔 땅의 이민국에서 허락 도장을 받아야 했지.
네팔 안나푸르나를 가기 위한 첫 여정이었던 거지.
수진, 너는 네팔이라는 나라를 아니? 안나푸르나는 가보았어?
나는 네팔도 처음이지만 솔직히 안나푸르나는 뭐 하는 곳인지도 몰랐고 어디에 있는지조차도 몰랐어.
나의 형편으로는 남의 나라를 여행하는 일은 하늘에 별따기만큼이나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남의 나라에는 관심이 없이 살았거든. 그래서 퉁친 생각이 '여행은 돈 드는 일이고 돈 있는 이들의 사치!'라는 거였지. 참으로 무식하고 무지하게 꽉 막혀있었거든.
그러나 여행, 아니 모든 게 낯선 남의 나라를 가는 일은 나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최고의 공부 도량임을 알고 나서는 기회만 주어지면 마다하지 않고 짐을 꾸리기로 했어. 그 첫 번째 결과가 안나푸르나 ABC캠프였는지도 몰라.
알고 보니 안나푸르나는 세계의 트래커들이 한 번쯤은 꼭 가려고 하는 곳이더구먼.
우리는 먼저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로 가서 기본으로 필요한 걸 샀어. 하멜촉 거리는 세계의 산악인들이 등반할 때 필요한 온갖 물품들을 사는 곳으로 이름나 있대. 짝퉁이지만 웬만한 명품보다 낫고 싸다는 게 정설이어서 찾는 이들이 많다는 거야.
인도를 포함한 이번 순례 여행을 이끄시는 스님은 내가 안나푸르나에 입고 갈 옷을 몇 군데의 상점을 돌며 마츰한 것을 사주셨어.
안나푸르나에 가려면 따뜻하고 가벼운 등산 점퍼가 필요하다는 거야. 그런 걸 아는 다른 이들은 다 챙겨 왔지만 꿈에도 그런 곳을 갈 거라는 생각해 본 적 없는 나는 그런 옷이 있을 리 없었고 살 돈도 없었던 거지. 그래서 버려도 좋을 남의 옷을 빌려왔는데 두껍고 무거운 솜옷이었던 거야. 그걸 보신 스님은 도저히 안 되겠다 여기셨는지 내 옷부터 사주셨던 거지. 얼마나 고맙고 죄송하던지...,
우리는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포카라로 갔어.
그곳은 국제산악박물관(International Mountain Museum, 이하 IMM)이 있는데 그 박물관은 네팔 정부에서 만든 게 아니라 세계 등반인들이 만들었다고 해. IMM은 2002년 5월 29일 임시로 개관했다가 2004년 2월 5일 공식으로 개관했다더군.
국제박물관을 그곳에 만든 이유는 세계를 통틀어 8,000미터 이상의 독립봉이 14 좌인데 그 가운데 7 좌가 네팔에 있어서래.
그리 크지 않고 소박해 보이는 박물관에는 네팔의 여러 소수민족들의 삶의 방식, 지리와 기후의 특성이나 음식 문화를 알 수 있는 것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세계의 등반인들을 도와 함께 등반했던 세르파족 사람의 역사와 히말라야 등반 역사, 그리고 14좌를 등반한 산악인과 우리나라 산악인들도 소개하고 있었어.
(2013년에는, 국제산악박물관 개관 10주년 기념으로 2011년 등반하다가 연락이 끊긴 고(故) 박영석 대장을 추모하는 '박영석 관'을 신설함.)
어쨌든 모든 등반인 들은 포카라를 들러야 하는 까닭은 입산 신고서와 허가증을 받기 위해서야.
우리는 안나푸르나 ABC캠프까지 오르겠다는 신고서와 입산 허가증을 받은 뒤 포카라 상점 거리로 갔어. 그곳에서 일주일 여정에 필요한 물품들 가운데 더 필요하겠다 싶은 침낭과 지팡이 두 개를 장비 대여 상점에서 빌렸어.
트래킹 첫날, 아침 일찍 게스트 하우스에서 주는 아침을 먹고 짐을 꼼꼼히 챙겨 넣은 배낭을 메고 버스터미널로 가서 버스를 탔어.
산으로 오르는 들머리 마을에서 내린 우리는 결기를 다졌지. 욕심부리지 않고 무탈히 ABC까지 가기를.
협착증과 디스크로 시원치 않은 나를 배려해 주는 일행의 도움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어. 하루 여덟 시간쯤 걸으면서 낯선 문화를 맞닥뜨리며 마음을 보는 것도 좋았지만 무려 여덟 시간을 걸어야 하는 몸뚱이를 살피는 것도 나쁘진 않았어. 우리는 그렇게 나흘 동안 올라갔고 사흘에 걸쳐 내려왔어.
이제 트래킹 과정을 본격으로 이야기해 볼게.
트래킹 첫날은 나야풀에서 내려 물어물어 시나울리로 향해 갔어. 왜냐면 입산신고서를 내야 했거든.
허락 도장을 받은 뒤 본격 트래킹이 시작됐지. 걷다가 쉬다가를 되풀이하며 도착한 곳은 간드룩이라는 마을, 트래킹 첫날은 구릉족이 운영하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머물었어. 그 마을은 산마을이라 비탈 논밭이랑 돌이 많았어. 돌은 푸른 듯 검은빛을 띠고 있고 우리나라 온돌방, 그러니까 불 때는 방 구들을 놓을 때 쓰면 좋겠는 돌이었어. 그러나 그 마을엔 불 때는 구들은 없었고 그 돌들은 지붕이나 계단을 놓는데 쓰였어. 오르내리막으로 만 이루어진 곳이기에 계단이 없으면 미끄러질 일이 많겠다 싶었어. 비탈 마을 한쪽엔 태양광 패널이 있었는데 게스트 하우스에서 쓰는 따뜻한 물은 그곳에서 만들어지는 거래. 비록 계단 길 곳곳에 말똥과 소똥이 장식품처럼 놓여있지만 푸근한 시골 정취가 느껴지는 마을이었어. 트래커들이 산을 오르고 내리는 동안 잠깐씩 들르는 것 말고는 아주 한가로워 보이는 아름다운 마을이었지.
하룻밤 자고 난 우리는 다시 또 걸을 준비를 했어.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