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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날마다 새로운 듯 그러나 설렘 일지 않았어.

인도 기차를 타보고 싶다던 벗에게 - 13

by 버폐

수진, 집을 떠나온 지도 어느덧 두 달이 넘어가고 있어. 내 삶에서 익숙한 것들로부터 이렇듯 오랫동안 떠나온 적이 얼마만인가 싶어.


우리는 인도와 국경 지역인 '소나울리'에 도착, 택시비로 거금 100달러에 팁까지 얹어 주고 기사와 헤어졌어.

그러고는 네팔 이민국으로 가서 인도로 가려는 출국 절차를 밟고 인도로 넘어간 뒤 이민국으로 곧장 가서 입국 절차를 밟았어. 바라나시까지 가야 하거든.

곧장 가면 몇 분이 안 걸리고 걸음으로도 몇 백 보 안 되는 거리지만, 버스와 택시들이 오가는 길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세워놓은 문 이쪽저쪽에서 절차를 거치는 시간은 몇 시간이 걸린다는 걸 온몸으로 겪고 나서야 나라와 나라를 잇는 국경임을 실감했어.


네팔에서 인도로 들어가는 데는 몇 발자국이면 되지만 시간 차이는 15분이야.

우리는 양쪽 이민국에서 출국 입국 절차를 밟은 뒤, '고락푸르' 역으로 가는 택시를 탔어.

한 사람에 200루피라고 하여 600루피를 주었는데 100루피를 더 주면 다른 사람은 태우지 않겠다고 하여 100루피를 더 얹어주었어. 그 자리는 운전석 옆자리로 세 명이 타는 자리지만 인도 사람들은 보통 대여섯 명이 탄다는 사실이고 우리 밖에 안 태웠지만 돈은 몇 배 더 받았을 거라는 거. 무슨 말이냐고? 인도 승객의 요금은 50루피 정도거든.


10인승 밴에 열네 명이 타고 1시간쯤 달렸을까! 차 지붕에 짐이랑 앉아있던 조수가 내려와 우리가 앉은 곳으로 슬그머니 끼어 앉더니 "같이 앉아도 되겠냐?"는 거야. 그래서 "다른 사람 안 태운다고 하여 비용을 더 내지 않았냐?" 했더니 "노 프라블럼!" 그러더니 운전석으로 가는 거야. 운전기사는 아주 자연스럽게 다리를 모으고는 양팔을 벌려 조수를 태우대? 그러더니 조수가 운전을 하고 가는 거야. 한쪽 엉덩이만 겨우 걸친 채.

기가 막혔지만 익숙한 일이라는 듯 그저, "노 프라블럼!"



우리는 어둑해진 뒤에야 고락푸르 도착했어.

바라나시까지 가려면 시킴이나 다르질링으로 가야 하고 그곳에서 바라나시로 가는 걸 갈아타야 한다나 봐.

그래서 먼저 기차역으로 갔는데 다른 곳으로 가라는 소리만 되풀이...,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와 달라 역 사무실로 가서 물어보고 또 물어보기를 거듭했어.

그걸 어느 역무원이 봤던지 친절하게도 500미터 정도 떨어진 다른 사무실로 같이 가주었어.

그런데 정작 그곳에선 일요일이라 문을 닫았으니 내일 아침에 오라는 소리만 하고, 결국 우리는 호텔을 알아보아야 했지.


인도의 친절한 사람은 참으로 친절하지만 어떤 이는 외국인을 돈으로만 보는 건 아닌지 싶을 때도 있어.

우리가 묵었던 호텔에서 있던 일이야.

처음에 방이 있는가 물었더니 2개에 500루피(더블은 300루피 싱글은 200루피)라대. 하여 짐을 풀고 숙박계를 꼼꼼히 쓰라는 대로 쓰고 나니 50루피를 더 내라는 거야. "왜요?" 했더니 "처음에도 그렇게 말했다"는 거야.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실갱이 하기 싫어 더 주었어.

모기가 와글거리는 식당에서는, 로띠(화덕에 구운 납작한 빵)가 반은 타고 반은 구멍이 나 있는 것을 손으로 달랑달랑 들고 와 접시에 턱 얹어 주는 거 있지.

이런저런 모습들에 문득문득 한국이 그리워질 때가 있어.



아무튼, 날마다 새로운 낯선 거리 낯선 사람 낯선 문화를 만나면서 그 또한 사람의 삶이라는 걸 깨닫곤 하는데 신기하게도 설렘은 한 번도 일지 않았어.

솔직히 고백하자면 여행을 하는 동안 느껴보고 싶은 게 있던 듯해. 이를 테면 '설렘'같은 거지.

첫사랑의 두근거리는 고백 같은 또는 떨리는 가슴으로 나누던 달콤한 입맞춤 같은 그런 느낌 말이야.

그런데 그런 두근거림이나 설렘 따위는 일어나질 않았어.

그저 오래된 연인처럼 덤덤하였고 가끔 '우와!' 같은 짧은 탄성을 내뱉을 뿐이었지. 오래된 연인이 가끔 보여주는 멋진 모습 또는 생각을 때리는 시구(詩句)에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감탄처럼.

가슴이 너무 메마른 걸까?




성지(聖地)를 돌며, 또는 낯선 나라 낯선 도시 낯선 거리를 돌며 후회보다는 마음가짐이 새로워지는 걸 느끼곤 했어.

'다시 한번 제대로 둘러보자.'

시간이 주는 아쉬움이 컸기 때문일 거야. '나의 성지순례'하면, 무엇에 쫓기듯 그저 바삐 바삐 걸어 다녔다는 사실이 가장 먼저 떠올라.

만약, 또다시 기회가 주어지면 마음이 이끄는 대로 느긋하게, 어느 곳에 머물고 싶으면 한껏 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다만 며칠만이라도 마음 곳간을 활짝 열어두고 생각도 쉬게 하면서 다니고 싶어.

나의 스승이 그랬던 것처럼.



수진, 우리는 바라나시에 며칠 머무르면서 다시 또 강가(갠지스)로 갔어.

배를 타고 여유로이 둘러보고 싶어 뱃삯을 흥정하는데 서로 얼토당토않은 값을 부르다가 우리가 지레 포기했어.

그러고는 화장터 쪽으로 가는 골목길을 걷는데 여행객들에게 '맛난 라씨'로 이름난 '블루라씨'가 저만치 있는 거야.

라씨는 인도 전통 음료인데 뭐랄까, 즉석에서 만든 요구르트 같다고나 할까!

설탕과 소금 간을 해주기 때문에 더 시고 더 고소하고 더 단 맛이 나더구먼.

라씨 한 잔 씩을 시켜놓고 마시는데 골목길이 갑자기 요란해는 거야. 내다보니 장례행렬이야.

라씨 한 잔 마시는 동안 무려 세 구의 주검이 화장터로 향해 가는 걸 보았어.

노란 빛깔의 천으로 덮인 주검, 만트라를 외우며 주검을 떠메고 가는 사람들, 주검은 곧 강가의 물에 씻겨진 다음 장작더미에 올려질 것이고 곧 불길에 휩싸일 거야. 그 행렬을 보면서 우리는 라씨를 먹고 있고...,

라씨를 마저 먹고 나서는데 또 한 구의 주검이 골목을 지나가고 있어.

'아, 인도구나!'

한 걸음 바깥은 장례 행렬이요, 한 걸음 안은 목숨을 이어가느라 꿈틀거리는 곳임을 생생히 볼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인도더군.



인도는, 뿌리 깊은 카스트 사상이 아직도 흔들림 없는 곳이며 신을 빼놓은 삶은 상상할 수 없는 곳이래.

힌두이즘들은 자신의 발이 땅에 붙어있지 않다고 믿는다는 말에 강가에서 만났던 바라문 사제가 생각났어.

그들은 삶은 현실이 아니라 믿으며 모든 건 환(幻)이라고 여긴다는 거야.


'인도는 가난하지 않으므로 모든 공사 대금은 넉넉히 내려온다. 하지만 정부를 통해 한 단계씩 내려올 때마다 반 씩 떨어진다. 인간의 몸으로 신()들의 삶을 살다 보니 아마도 인간의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어서 부정이 일어나는 모양이다.'

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을 정도로 다리나 건물 또는 도로를 건설할 공사대금이 나오면 반을 뚝 잘라 고위층 사람이 가지고 다시 그 아래 단계 사람이 떼어 가지기를 단계마다 하다 보면 맨 끝 공사 현장에는 10%만 남는다는 거야.



더욱 놀라운 문화는 지금도 뼈대(?) 있는 가문이나 가정의 여인들은 바깥출입을 하지 못한대.

쉽게 말하자면 바라문 계급 사람들은 거리에 다니는 여인들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뜻이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 여인 책임이라고 여긴다는 거야.

심지어는 때려죽여도 할 말이 있고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다는 거지.

여인은 아무런 보호막이 없으며 그저 가정에 종속된 삶을 사는 존재라는 게 인도 문화라는 거지.

더 충격인 건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아니 우러름을 받는 이는 어머니의 자궁 아래에서 태어났다고 말해선 안 된대.


인도 곳곳, 도심의 거리 곳곳에서 만나는 낯섦 또는 상식이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문화가 많아서 세계 곳곳의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있는 건 아닌지 곰곰 생각하게 하는 곳이 인도라는 건 분명하더군.


아참, 많은 걸 보고 느끼며 곰곰 생각하게 된 건 네가 인도 기차를 타보고 싶다는 말을 했기 때문일 거야.

그 말을 떠올리지 않았다면 너 또한 떠올리지 않았겠지?

고마워, 함께 해줘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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