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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화 Feb 14. 2023

'감상'하고파

대학에 다닐 때 가장 신기했던 건, 우리말이 아닌 타언어로 씐 문학을 전공한 교수님들이었다. 중어중문학, 일어일문학, 영어영문학, 독어독문학, 불어불문학, 서어서문학, 노어노문학... 어학 계열은 그나마 이해가 갔다. 언어를 쪼개어 가장 작은 단위까지 분류하고 분석하는 건 문과라기보다 이과의 영역에 가깝다고 하는데, 문과 계열 중에서도 유독 이과적인 두뇌가 발달한 사람들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문학 계열은 내게 그 자체로 불가사의였다. 어떻게 다른 나라 말로 쓰인 문학을 '감상'할 수가 있지? 


특정 문학에는 그 나라 혹은 문화권만의 독특한 정서가 들어있다. 그걸 정확히 무엇이라 콕 집어 설명하기는 참 어렵다. 예를 들어 '나 보기가 역겨워'에서 '역겨워'를 'disgusting'이라고만 해버리면 '역겨워'가 지닌 고유의 느낌이 잘 살지 않는 식이다. '역겹다'는 말은 'disgusting'과 완전히 다른 말이다. 말 맛도 다르고 말 질감도 다르다. 발음할 때 화자의 입모양도 확연히 다르다. 


맨부커상을 수상한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일부러 영문판인 <the vegetarian>으로 읽어본 적이 있다. 한강의 글말을 번역을 통해 영어로도 오롯이 재현해낼 수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결과는? 잘 모르겠다. 내가 영어와 한국어를 모두 유창하게 구사하는 바이링구얼(이중언어사용자bilingual)이라면 알 수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한국어가 모국어이고 영어는 제2 외국어로 학습한 사람으로서 판단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한글이 영어가 되는 순간, 한글에 담긴 고유의 혼이 완전히 공중분해 되어버리는 것만 같달까? 


영국 낭만주의 문학의 대가 퍼시 비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의 시를 원문으로 접한 적이 있다.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들이 감탄하며 마르고 닳도록 읽은 시라고 하는데,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심지어 번역된 내용으로 읽어도 지적으로는 '와~ 멋진데' 싶었지만 감정적으로는 하나도 와닿는 것이 없었다. 이성은 종이 위 활자를 보지만, 감성은 그 활자 너머의 마음에 가 닿으려고 한다. 그건 우리가 태어나서 먹고, 입고, 자는 내내 주변을 공기처럼 감싸고 있던 '어머니말'의 영향력 때문일거다. 어머니말, 모국어는 곧 '생존'의 말이다. 알아듣지 못하고 직접 말하지도 못하면 어머니가 속한 어른들의 세계 속으로 진입할 수가 없다. 말그대로 죽는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동물'적인 인간에서 '사회'적인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기를 쓰고 익혔던 한국어의 영향력은, 깊은 무의식 곳곳에까지 뻗쳐 시나브로 '한국인'의 마음과 정신을 형성했을 거다. 그처럼 빈틈없이 한국어로 점철된 마음의 요새를 뚫고 들어올만큼 강력한 감흥을 일으키는 '외국어' 문학작품을 찾기란, 어쩌면 불가능한 일 아닐까(찾은 분 연락주세요 좋은 건 같이 봐야죠). 


시나 소설의 한 구절을 접하자마자 '아!' 하고 탄성을 지르는 주체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다. 그 과정에 '번역'이 들어갈 리 만무하다. 그 과정을 거치고서도 '아!' 하고 탄성을 지를 수 있다면 그는 아마도 언어 천재일 것이다. 나는 언어 천재가 아니기에 우리말로 되어있지 않은 문학작품들에는 '아!' 하기가 참 힘들다. 그게 좀 슬프다. 천국에 있는 퍼시 비시 셸리도 (12년이나 영어를 공부해놓고도) 자기 시의 진가를 알지 못하는 나를 아마 조금쯤은 안타까워 해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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