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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화 Feb 15. 2023

불행 초과의 시대

어딜 보나 불행하다. 뉴스에서는 연일 튀르키예 지진 소식을 보게 된다. 뉴질랜드는 사이클론으로 인해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고 한다. 미국에선 '또' 총기 난사 사고로 억울한 목숨이 스러졌다. 미얀마에서는 폭탄 테러가 발생해 기차역에 있던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당했다. 불과 몇 달 전 한국에서는 대형참사가 발생해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수백명의 어린 삶이 일시에 멎고 말았다.


불행은 팬데믹 시기 디폴트 감정이었다. 하지만 전 세계 누구나가 겪고 있는 문제이니 적어도 '공평한 불행'이었다. 그런데 최근의 일들은 '공평'을 논하자면 할 말이 없다. 재난을 당한 사람들과 나의 차이는 그야말로 '한끝'이기 때문이다. 우연하게도 그들은 거기 있었고 나는 여기 있었다. 그뿐이다. 튀르키예에 가면 카이막과 케밥을 마음껏 먹어보자며 들뜬 마음으로 여행을 계획하던게 지진이 일어나기 불과 이틀 전이었다. 단 하루 사이에 땅이 찢어지고 그 위에 발붙이고 살던 이들이 소리소문 없이 잔해 속으로 묻혀버렸다. 아직도 그 생각만 하면 소름이 돋는다.  


불행이 가득한 화면을 보고, 그 속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 소리를 듣는 사람들의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다. 불행은 사실 피로하다. 연민과 슬픔, 경악과 충격이 수용 한도를 넘어가면 사람들은 자동으로 마음의 셔터를 내린다. 살기 위해서다. 저 화면 속 불행이 나에게도 닥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원시적인 공포로 머리털이 쭈뼛 서버린다. 여느 때처럼 음식을 씹으면서 '그 사람들은 먹을 것도 없이 추위에 떨고 있다는데 잘도 먹는구나' 같은 생각이 떠오르면 애꿎은 밥만 얹혀버린다. 따뜻한 물로 씻는 것, 가족들과 저녁 무렵 오손도손 대화 나누는 것, 쾌적한 기분으로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것, 아무런 걱정 없이 전철에 오르고, 길을 걷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도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자리에 드는 것. 이 모든 일이 다 죄악인 것 같고 내 존재가 한없이 무겁고 비열하게 느껴질 때, 사람들은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타인의 공포를 애써 외면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거짓말처럼 튀르키예로 향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 세계에서 자원봉사자가 몰려들고 한국에서도 구조대원들이 파견을 나가있다. 그들은 내가 외면한 공포를 분연히 들추고 인내심으로 파헤치면서 암흑 속에 묻혀있던 사람들을 끝끝내 구해낸다. 기부는 휴대전화 터치 하나로 끝나지만, 구조활동에는 구조하는 자의 삶 전부가 걸려있다. 불행이 가득한 화면을 희망으로 조금씩 채워가는 그들의 모습 덕분에 나는 셔터를 활짝 젖혀두기로 한다. 비현실적인 선함이 현실적인 절망을 의연하게 떨치고 일어나는 장면들과 마주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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