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보니 본문은 원작 시의 내용과는 큰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엄마 말씀으로는 나같이 질투가 많은 아이도 드물었다고 한다. 친구 장난감을 빼앗고 유치원에서도 종종 거칠게 놀았다고 한다. 나야 기억이 가물가물하니 무작정 반박하기도 어렵거니와 사실 '질투가 많은 아이'라는 말이 그리 싫게 들리지는 않아 엄마의 기억에 전적으로 맡겨두고 있다. 왜 싫지 않냐면 적어도 욕심 없는 아이보다는 썩 괜찮게 느껴져서다. 학창시절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시를 처음 접했을 때 제목에서 어떤 묵직한 힘 같은 것이 느껴졌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적당량의 질투와 욕심은 필요한 법이다. 그것은 삶을 향한 의지이며 동물적인 본능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나는 의지와 본능을 두루 갖춘 매우 '인간'적인 여자이고 싶었고 지금도 그렇다. 다 내려놓고 날 잡아잡숴, 하는 무기력한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다.
질투는 인생의 여러 변곡점에서 정말로 힘이 되어주었다. 나는 또래들이 하는 건 다 해보고 싶었다. 개중에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더 많았지만 질투는 노력의 동력원이 되어주었다. 공부도, 일도, 사람 관계도, 어느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아 최선에 최선에 최선에 최선을 다했다.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하등 중요치 않았다. 엄마는 딸의 그런 대책없음과 순진함에 항상 이마를 치곤 하셨지만 나는 질투를 모터삼아 질주를 멈추지 않는 건강한 경주마처럼 한정없이 내달리며 살아왔다. 그러는 와중에 소중한 관계가 어그러지기도 하고, 순간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여유를 놓치기도 했다. '넌 왜 그렇게 이기적으로 살아?' '너랑 있으면 너무 팍팍해' '매사에 너무 긴장해 있어' 따위의 핀잔과 비난, 진심어린 충고들은 덤이었다. 하지만 질투, 질투만은 나를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곁에 있었다. 끊임없이 속삭여왔다. '더, 더, 더, 더, 더!'
'더, 더, 더!' 질투의 에너지는 정말로 못말리는 수준이다. 사람들은 질투의 탐욕스러움과 뻔뻔함, 원초적인 이기심을 두려워한다. 질투라는 감정은(종종 시기와 한 세트로 취급받곤 하는) 종교에서는 금하고, 윤리와 도덕에서는 부정적인 것으로 가르치곤 한다. 나는 그렇게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질투가 때론 안타깝다. 질투는 잘 다룰 때 그 무엇보다 강력한 힘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내가 질투를 잘 다뤄왔다고 말하는게 아니다. 아직도 질투를 대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우왕좌왕하곤 한다(그러다 끌려가기 일쑤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질투의 잠재력을 안다. 질투는 나아가게 한다. 보다 잘하게 한다. 일으켜 세운다.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게 한다. 나에게도 남들만큼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믿게 한다. 질투는 힘이고, 이 힘은 다른 모든 힘들과 마찬가지로 다루는 이의 역량에 달려있다고, 그러니 잘해보자고, 오늘도 당당히 서서 뒷발을 힘차게 구르는 질투를 마주한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