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란화 Sep 26. 2024

어떤 얼굴

적다고도 많다고도 볼 수 없는 시간 동안 여러 얼굴들을 보았다. 길거리에서, 버스 차창에서, TV 화면 속에서, 신문지면에서, 옆자리에서, 식탁 맞은편에서, 옷가게에서, 화장실에서, 결혼식장에서, 학교 복도에서... 너무 많이 보아서 한데 뭉개질법도 한데 소중하고 각별한 얼굴들은 마음 속에 새겨져 그대로 남아 있다. 아마 그 얼굴들은 내 생이 다하는 날까지 언제까지고 나와 함께 할 것이다. 어쩌면 그런 얼굴들과 만나기 위해서 태어나고 지금껏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얼굴은 원래 고어로는 '생김새'를 뜻한다고 들었다. 오늘날처럼 국부적으로 목 윗부분에 한해 눈, 코, 입만을 뜻하는 용어가 아니었던 것이다. 얼굴은 한 사람의 모습 그 자체를 의미하는 말이었다고 생각해도 괜찮을까? 나는 고어로서의 '얼굴'이란 단어가 더욱 마음에 든다. 한 사람을 마주할 때 우리는 자연스레 그 사람의 전체를 본다. 눈, 코, 입만 동동 떠다니는 동그라미에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구불구불하거나 뻣뻣한 머리칼, 둥글거나 각진 목선, 부드럽거나 퉁명스레 굳은 어깨선,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팔다리, 수줍어하듯 한껏 들어간 배, 긴장되거나 유연한 손가락, 가뿐하거나 피곤해보이는 발목을 본다. 얼굴은 곧 오라(AURA), 아우라다. 강렬한 아우라는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잊을 수 없는 얼굴과의 만남은 생을 바칠 가치가 있다. 


나는 내가 낳은 아기의 얼굴을 보았다. 보았다는 표현만으로는 불충분한 경험이었다. 아이의 아우라가 나를 순식간에 덮어버렸다. 내가 낳았으니 너무 예뻐, 어쩜 이렇게 잘생겼지, 하는 차원의 감탄과는 달랐다. 아가는 완벽했다. 존재만으로 완벽하다는 말의 의미를 몸으로 이해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저 누워서 잠을 자고 있는데, 그것만으로 아무런 수사나 수식을 요하지 않는 절대적인 온전함(wholeness). 누구도 흉내낼 수 없고, 누구도 흉내낼 필요 없는, 존재 자체로서의 만족. 


잊을 수 없는 얼굴과의 만남은 생을 바칠 가치가 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질투는 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