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란화 Sep 28. 2024

강박증(OCD)


 강박증이 있다. 수식어로서의 강박증 말고, 진짜 '병적인' 강박증 말이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다. 문을 닫는다. 잘 닫혔는지 확인한다. 또 확인한다. 그리고 다시 확인한다. 다른 일을 하다가 돌아와서 확인한다. 답답해서 한 번 더 문을 열었다가, 이제 진짜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닫는다. 휴, 안심하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린다. 아, 문을 정확히 잘 닫는 의식(ritual)을 방해받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 원점이다. 이런 류의 강박증을 나는 데리고 산다. 같이 산지 십수년이 넘었다. 


 최초로 인지한 강박증세는 시험에서 발현되곤 했다. 중학교 때부터 OMR 카드를 마킹할 때 이름과 수험번호를 지나치게 여러번 확인하는 습관이 있었다. 습관이라고만 여겼지만 나중에는 내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부담감이 느껴졌다. 시험에 대한 공포보다 OMR 카드를 정확히 작성하는 것에 대한 공포가 압도적일만큼. 강박은 카드 마킹에서 문제 확인으로 나아갔다. 한 시험당 스무개의 수험문제가 있다면 정해진 60분 동안 그 스무개 문항을 각각 스무번도 넘게 확인했다 (전혀 과장이 아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나는 문제를 빨리 풀어야만 했고, 문제를 빨리 풀려면 평소에도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해야만 했다. 어른들은 내가 1등을 하면 '1'에만 주목했다. 나는 '1'에 감춰진 나의 비정상적인 강박사고에 주목했다. 남들은 안 그럴텐데, 왜 나만 이럴까. 부끄러웠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간절히 도움을 바랐지만 그저 '1' 뒤에 숨고 싶었다. 


 중증 이상으로 강박증이 심한 사람들은 손을 씻기 위해 1시간을 할애한다고 한다. 다행히도 나의 경우, 강박 의식은 5분을 넘기지는 않는다. 다만 그 5분을 넘지 않기 위해 초인적인 정신력을 발휘해야 할 뿐이다. 나는 내가 문을 닫건, 수도꼭지를 잠그건, 인덕션 off버튼을 누르건, 전기 장판의 콘센트를 뽑건, 자료를 업로드하건, 사진을 전송하건, 그릇을 씻건, 과일을 소독하건 간에 언제나 어마어마한 정신적 에너지가 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머릿속에서 끝나지 않는 술래잡기를 하는 기분이 든다. 어떤 때는 서글퍼진다. 또 어떤 때는 지긋지긋해진다. 이쯤되면 내가 강박증을 데리고 사는 게 아니라 강박증이 나를 데리고 살아주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강박증도 얼마나 내가 지겨울까. 


 강박의 원인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 PTSD와 강박이 함께 한다. 하지만 원인을 따지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강박증과 함께여도 여전히 나로서 살아갈 수 있는가이다. 나는 내가 문을 열고 닫거나 몸을 씻거나 메일을 읽고 쓰는 일을 아무런 불편함 없이 수월하게 해내던 때를 기억한다. 그때의 나는 강박증이 없어서 행복했는가? 아니다. 그때는 강박증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경험해보지도 못했기에 그것이 있고, 없고가 나의 행복을 좌우하지 않았다. 강박사고와 강박행동 따위의 거북함없이 수월히 흘러가는 일상은 당연한 것이었고, 그런만큼 그때는 또다른 문제들이 나를 괴롭히곤 했다. 


 나는 언제나 나였다. 강박증이 있건 없건, 행복하건 불행하건, 기쁘건 속상하건, 배고프건 배아프건 간에 나는 변함없이 나였고 주어진 순간의 삶에 충실하면서 그때만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살아내었다. 그러니 대체 왜 강박증은 내게서 사라지지 않는가, 떠나지 않는가를 강박증에게 묻기보다 나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너는 강박증과 함께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어디까지 가고 싶은가. 나는 그저 갈 수 있는데까지 가보고 싶다. 내 목에 잔뜩 힘을 주어 매달려있는 강박증이 어느 순간 지쳐 나가 떨어진다면 좋다. 그리고 도무지 그럴 기세가 보이지 않아도 여전히 좋다. 강박증은 그의 할 일을, 나는 나의 할 일을 하며 그렇게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혹시 이 글을 우연히 접하게 된 분들 중 강박증을 가지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 강박증을 하루라도 빨리 벗어버려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자고. 강박증은 거기 그대로 두고, 우리는 계속 우리의 삶을 이어가자고. 그러다보면 어쩌다 생겨난 그 우연스런 속성만큼이나, 강박증은 가볍고도 일면 허무하게 우리의 목덜미에서 스르르 내려와줄 것이니까.              

작가의 이전글 그 사람의 삶에서 사라지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