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드모트 (aka 페미니즘)
네글자 네글자 신나는 노래 나도 한번 불러보자
내가 여자로서 절대적으로 언급을 삼가하게 되는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페미니즘일 것이다. 페미니즘이라는 네 글자는 모두를 화나게 만들곤 한다. 의견이 없던 사람도 별안간 투사가 되게 하는 단어가 바로 페미니즘이다. 내가 청춘을 바쳐 공부한 주제가 사람들에게 환영받기는커녕 볼드모트 취급을 받는 천덕꾸러기인 건 썩 유쾌한 경험이 못된다.
나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공부했다. 여성학은 영어로는 women's studies, gender studies 등으로 불리는데 조금 거칠게 말하자면 페미니즘을 연구한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여성학을 전공했다고 하면 정말로 모르는 사람들은 천진한 표정으로 여성의 생물학적 특성에 대해 공부했냐고 물어오고(그런 표정이어서 차라리 감사합니다), 여성학과 페미니즘을 동일시하는 사람들은 한껏 구겨진 표정으로 왜 남성혐오를 돈주고 사서 배우냐고 반문하고(익숙한 반응), 페미니즘을 혐오하는 사람들은 그 짧은 순간 나와의 영원한 절연을 결심한 양 입을 앙 다물어버린다(불편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한때는 사람들의 부정적인 반응을 너무도 깊게 내면화한 나머지, 나조차 내가 공부하는 것을 경멸하고 얕잡아 본적도 있었다. 지금에 와서 내가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답은 다음과 같이 아주 심플해졌다. 나는 페미니즘이 궁금했다. 세상의 문법과 다른 문법, 세상의 관점과 다른 관점을 가진 여성학에 대해 더 깊이 알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페미니즘을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들이 현실에, 그것도 상아탑에 존재한다. 내가 그 산? 증거다)
이따금 생각한다. 왜들 그리 분노할까. 여성학을 공부하고, 페미니즘과 관련된 주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어째서 제정신이 아닌 사람 취급을 받는걸까. 왜 '나는 남성 혐오자가 아니지만...'이라는 말을 변명처럼 늘어놓아야 하는걸까. 아직 아무 말도 안했는데 왜 조용히 하라고 할까. 권리만 알고 의무는 모르는 이기적인 족속이란 욕을 왜 들어야 하는걸까. 왜 피해망상이 있다는 오해를 받는걸까. 페미니즘으로 인해 재산을 잃은걸까? 페미니즘 때문에 사돈에 팔촌까지 패가망신한걸까? 페미니즘이 밤마다 찾아와 숙면을 방해하기라도 하는걸까? 페미니즘이 PTSD를 일으킨 주된 원인인걸까?
기존 시스템에 제동을 거는 모든 것들은 불안을 일으킨다. 페미니즘은 '제동'의 사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편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페미니즘은 불편해한다. 그러니 천덕꾸러기인 것이다.
재미있게도 나는 천덕꾸러기와는 거리가 멀다. 모범생이었고, 착실한 직장인이었고, 충실한 배우자이고, 효심충만한 딸내미이다. 그런 내가 모든 것에 불편하다고 반기를 드는 페미니즘을 궁금해하고 또 공부하다니, 얼핏 생각하면 반대가 서로 끌린다는 말이 이런 때 어울리는게 아닐까 싶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일이다. 시스템이 주는 안정 속에서 시스템의 혜택은 모두 누리는 주제에 시스템에 저항하는 사상을 맛보려하다니. 마치 볼드모트를 사랑하게 된 헤르미온느처럼 불온하고 변태적이기까지 하다.
나는 애초에 페미니즘이 옳다 또는 그르다는 이야기를 하고팠던 것이 아니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 라는 것에 대한 한 개인의 소견은 그리 중요치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나는 내가 그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 내 목소리로 풀어낼 권리는 갖고 있다고 믿는다. 그건 나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보장되는 권리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명실공히 우리 사회에서 볼드모트급의 금기어가 되었으며, 여성인 내가, 심지어 전공자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해 편안하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없게 되었음이 매우 안타깝다.
볼드모트가 더 이상 볼드모트가 아니기 위해서는 그의 이름을 불러 그를 이곳으로 소환하고 그의 얼굴을 직면해야만 한다. 페미니즘은 어둠의 마법사만큼이나 소환할 가치가 충분한 매력적인 주제라는 것에, 전공자로서의 수줍은 명예를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