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제법 흘렀지만 여전히 눈물이 마르지 않는 날들이 있다.
처음엔 내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이 미안했다.
웃는 것도, 맛있는 걸 먹는 것도, 좋은 걸 보고 감탄하는 것도
모두 나만 앞서가 버리는 일처럼 느껴져 죄스러웠다.
이런 감정을 느껴도 되는 걸까, 스스로를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의 방향이 조금씩 달라졌다.
'살아남은 사람'이 아니라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그 변화의 중심에는 아이가 있었다.
우리 둘은 원하지 않았던 결핍 속에 놓여 있다.
그럼에도 내가 아이를 온전히 사랑하고 지켜주지 못한다면
그건 내 몫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일일 것이다.
내가 어제에만 머물러 있느라
아이가 바라보는 오늘과 내일을 함께하지 못한다면
그건 아이의 시간을 또 한 번 멈추게 하는 일이니까.
거창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매일의 사소한 일상들이 쌓이면서 마음이 조금씩 달라졌다.
그리고 글을 쓰는 동안 알게 된 것이 있다.
상실은 끝이 아니라
여전히 그 사람과 연결되어 있는 또 다른 방식이라는 것.
그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
내 안의 언어로, 습관으로, 기억으로 조용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이제는 그를 품은 채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살아간다는 건
결국 그 사람 없이도 그 사람과 함께 걷는 일이라는 걸 조금은 알 것 같다.
책을 쓰는 과정 역시 그 배움의 일부였다.
출간이 인생을 바꿔놓은 건 아니었다.
(나만 아는 책.... 이 되어 가는 중이라 씁쓸하지만..ㅠ)
오히려 그 책을 써 내려가던 시간이 나를 바꿔놓았다.
매일 조금씩 쓰고, 붙잡고, 울고, 견디는 동안 이미 변화는 시작되고 있었다.
출간은 변화의 '시작점'이 아니라
혼자서도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건네는
하나의 '마침표'에 가까웠다.
나는 여전히 용기가 부족하고, 상처에 흔들리고, 감정의 파도에 쉽게 휩쓸린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한다.
완벽하게 괜찮지 않아도
나는 여전히 흔들리며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 과정에서 내가 붙잡은 문장은 하나이다.
'내일 죽어도 괜찮다'
그냥 그렇게 체념 속에 나온 말이 아니라
'오늘을 잘 살아내겠다'는 나만의 용기에서 나온 말이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집 안의 커튼을 활짝 걷는다.
햇빛이 방안 깊숙이 스며들게 하고
창문을 조금 열어 바람을 들여보낸다.
그 짧은 순간에 내 안에서도 무언가 환기되는 느낌이 든다.
"오늘 하루만큼은 잘 살아보자"
그렇게 스스로에게 매일 아침 인사를 건넨다.
어제를 후회하지 않고, 내일을 걱정하지 않고
그저 오늘만 살고
오늘만 사랑하려 한다.
어쩌면 그것이
지금의 나에게는 충분히 괜찮은
다시 살아가는 변화일지도 모르겠다.
무너져도 다시 일어서서
끝내 오늘을 선택하는 사람으로 남기 위해
나는 오늘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