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중심으로
들어가며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과 불충분한 기억이 만나 빚어지는 것이다.”라는 명제는 작품 초반 에이드리언 핀의 역사의 대한 생각이면서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이기도 하다. 주인공 안토니 웹스터의 불명확한 기억과 책에서 주어진 불충분한 설명을 근거로 독자가 재해석하며 이 책 자체가 하나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이야기는 1부와 2부로 나누어지며 1부에서 열거된 기억들을 이용해 2부에서는 에이드리언의 일기와 그의 자살에 대해 파헤쳐 나간다. 이야기는 모두 주인공의 관점에서 진행되며, 그도 언급하듯이 그의 기억은 확실하지 않으며 지극히 그의 관점에서 재해석되고 있고 망각된 부분도 많다. 우리는 그의 불충분한 기억을 읽으며 상황을 다시 해석하고 역사를 만들어 나간다. 이 책의 전체를 관통하는 ‘기억‘이 한 사람 인생에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고 저자가 기억에 대해 어떠한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이야기를 ‘기억’의 관점에서 해석하기에 앞서 줄거리를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주인공 안토니 웹스터는 모든 방면에서 평범한 인물인 것에 비해 그의 친구 에이드리언 핀은 생각이 깊으며 지적인 사람으로 묘사된다. 안토니는 여자친구인 베로니카가 자신과 헤어지지 얼마 되지 않아 에이드리언과 사귀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때 그가 편지 한 통을 썼고 그는 그들에게 긍정의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얼마 뒤 에이드리언이 자살하고 안토니는 그의 죽음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른다. 그러나 이후 그가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에게 받은 자신의 옛 편지를 통해 자신이 그들의 불행을 빌었으며 그 편지의 내용이 사실로 이를 감당할 수 없었던 에이드리언은 자살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는 전혀 감을 잡지 못한다”
책의 제목이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The sense of an ending)>인 것과는 다르게 주인공은 대부분의 상화에 대해 착각하거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야기의 중요 소재였던 ‘에이드리언에게 보낸 편지’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초반에 언급된 그의 기억에 의하면 안토니는 에이드리언에게 신중을 가할 것과 그들에게 행운을 빌며 편지를 마무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도 안토니는 ‘내가 기억하는 한’이라 말하며 자신의 기억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사실 편지는 행운을 비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 그들이 고통 속에서 살아갈 것을 바라고 있다. 이후 안토니가 당시의 편지를 베로니카에게 받고서도 그는 기억해내지 못하고 자신의 행동에 충격을 받는다.
어떻게 안토니는 실제 편지의 내용과 정반대의 내용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베르그송의 기억론에 따르면 기억은 습관과 달리 일회적이다. 기억은 잃어버릴 수 있어 역사는 없어지고 결과만 남게 된다. 안토니의 사례 또한 그의 기억은 일회성에서 그치며 시간이 지난 후 이야기(역사)는 없고 편지와 에이드리언의 자살이라는 결과만 남게 되었다. 그는 편지를 썼을 당시는 분노와 배신감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을 것이다. 안토니는 이 상황에서 적응하기 위하여 편지에 자신의 모든 감정을 쏟아내고 그는 그들을 기억에서 지운 채 그의 인생을 살아갔을 것이다. 이후에도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데 유용한 기억만 추출하고 이외의 것은 망각하였다. 에이드리언의 죽음은 그가 살아가는데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기에 그가 망각했을 것이다. 기억의 원추에서 의식적 주체인 ‘나’는 현재 행동에 필요한 기억을 끌어와 사용한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주인공의 ‘기억의 꼭짓점’만 관찰할 수 있기에 그가 편지에 관해 완전히 잊어버렸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베르그송 이론에 의하면 꼭짓점 뒤에 ‘무의식 기억의 덩어리’ 속에 남아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과 불충분한 기록이 만나 빚어지는 확신
작품을 완독을 한 후에는 초반에 언급되는 롭슨의 자살이 에이드리언의 죽음과 구도가 거의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롭슨의 자살 내용은 책 전체의 암시라고 볼 수 있으며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 자체이다. 작중 인물들은 롭슨의 자살을 그에 대한 단편적인 기억들과 그의 유서를 조합하여 롭슨의 자살을 규정하고 있다. 롭슨의 사건에서는 실재로서의 기억이나 실재로서의 과거는 없으며 그가 죽은 이후에 다른 사람들이 기억을 재구성함으로써 역사가 탄생한다. 이와 같이 독자들은 에이드라언의 자살을 주인공이 제공하는 단편적인 정보만 가지고 파악하며 책을 읽어 내려간다. 결말을 보기 끝까지 보기 전까지는 에이드리언이 철학적 고뇌에 빠져 자신에게 주어진 선물 같은 삶을 버렸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베로니카 어머니의 유서, 안토니의 편지, 에이드리언의 아들 등 여러 단서가 차례로 등장하면서 우리는 그 시점마다 기억을 재구성하며 현재에 맞게 사건을 해석하게 된다. 이러한 기억의 현상학적 과정들이 바로 에이드리언이 제기한 역사의 특징이며, 독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책으로 역사를 만들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베로니카는 정말 그를 무시했을까?
주인공 안토니는 자신의 옛 연인인 베로니카를 사랑했으나 또한 그녀가 자신에게 보내는 멸시의 시선을 견디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유물론적 기억의 관점에서 과거 베로니카와 그녀의 가족이 그를 무시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리보는 기억이 뇌 속에서 현재의 인상으로 소생되는 것이라 말한다. 안토니는 이야기가 전개되는 시점에서 그녀에 대한 기억을 소생시키고 있다. 베로니카는 안토니와 결별한 후 바로 그의 친구 에이드리언과 교제하여 안토니에게 큰 배신감과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사건을 보았을 때 주인공이 전 애인에 대한 안 좋은 인상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의 대한 부정적 인상이 뇌리에 박힌 상태에서 과거의 이야기를 풀어가다 보니 과거의 행적들이 좋게만 보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베로니카와 그녀의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들이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무시했다는 듯이 설명을 하여 자신과 헤어지고 친구와 사귀게 된 것을 의식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야기를 끝까지 감상해 보면 베로니카는 주인공을 사랑했고 그를 끝까지 배려하려는 모습이 보인다. 자신과 에이드라언에게 저주스러운 편지를 보내어도 참았으며 그 편지가 현실이 되어 에이드리언이 죽었을 때도 안토니를 직접적으로 탓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난 후에 안토니가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요구하거나 괴롭혀도 베로니카는 그를 기다리며 말하기 힘든 진실을 알려주고자 한다. 독자의 입장에서 베로니카라는 인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았을 때 그녀가 무뚝뚝한 태도를 보일지라고 결코 안토니를 무시하거나 업신여기지 않았으며, 안토니가 부정적으로 느꼈다 생각하는 것은 그녀와 좋지 못하게 헤어진 인상이 남아 기억에 작용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확실한 것은 무언가가 일어났다 정도이다.”
에이드리언은 헨리 8세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물어보는 선생님의 질문에 “무언가가 일어났다는 것만 확신할 수 있다.”라는 답을 내린다. 이 발언을 통해 우리가 경험했던 것, 또는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 모두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앞서 설명한 기억에 관한 담론들 모두 기억의 망각이나 부정확한 재해석을 다루고 있다. 이처럼 작가도 에이드리언의 말을 통해 이 책도 결국에는 안토니의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술되며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저자의 태도는 안토니의 말을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얘기하며 이 이야기들은 모두 자신의 관점에서 나온 이야기이며 실상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주인공에 대입하며 몰입하던 상태에서 빠져나와 비교적 객관적 태도를 가질 수 있다. 우리가 접하는 상황 모두 나 또는 타인의 시선을 반영하며, 우리가 정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가 일어났다는 사실뿐이다.
나가며
인간은 기억을 통해 현재를 바라보고, 또 현재의 인상으로 기억이 재조립된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속 인물들은 각자의 인상을 가지고 서로를 다르게 기억한다. 그러나 독자는 책의 주인공 안토니의 입장에서 밖에 그들을 해석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저자가 안토니인 역사 보고서를 읽는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불확실한 기억과 책 속의 단편적인 증거물이 만난 역사서이다. 이 책뿐만 아니라 다른 문학, 사회과학, 에세이 등 대부분의 글들이 이런 구성을 취한다고 볼 수 있으며 모두 의식하지 못한 채 자기만의 역사서를 써내려 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시선이 많이 담겼다고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여러 사람의 기억을 관찰하는 것이 우리만의 생각에 고립되는 것을 막을 수 있고,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