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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스러운' 데이트

by 삽질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아내와 저, 둘만 남았습니다. 아이가 없는 고요한 집안의 공기를 온전히 느껴본 게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간만에 생긴 둘만의 시간이지만 저희답게 아무런 계획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유튜브를 보면서 뭐 할까 이리저리 궁리를 해보는데 도무지 뭘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주저하는 사이에 볼만한 영화 상영 시간도 놓쳤으니 극장 데이트는 물 건너갔습니다. 그래도 도파민 터트리면서 소중한 시간을 보내긴 조금 아까운 것 같아서, 아내에게 근처 예쁜 카페에 가서 책도 읽고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자고 말했습니다. 아무 생각이 없는 아내님께서는 당연히 콜을 외치셨지요.


차를 타고 5분 거리에 있는 카페에 들어갔더니 11시부터 오픈이라고 합니다. 시간이 애매한데, 마침 아침을 안 먹었으니 간단하게 아점을 먹자고 아내님께서 제안을 하여 저도 콜을 외쳤습니다. 고급 진 카페에서 즐기는 보기 좋은 브런치 음식이 머리를 스쳤지만 아내의 첫 제안은 '감자탕'이었습니다. 갑자기 풋풋한 데이트의 향기가 사라지고 질펀한 중년의 쿰쿰함이 스며듭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명절 때 느끼하게 껴있던 기름기를 묵은지로 싹 씻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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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눈에 띄는 뼈다귀 해장국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조선족 아주머니들의 걸쭉한 환영인사를 받으며 들어간 곳은 오픈 10분 만에 테이블이 꽉 차는 맛집이었습니다. 우거지 뼈다귀 감자탕 소자에 볶음밥까지 야무지게 먹었습니다. 소주까지 하나 깠으면 중년'스러운' 데이트가 완벽하게 마무리됐을 텐데 아쉽게도 술을 끊었습니다. 부부 사이의 케미란 이런 게 아닐까요?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걸 제안하고 그걸 받아주는 케미 말입니다. 남들의 눈치 따윈 상관하지 않고 우리가 좋아하는 맛과 색깔을 찾아다니는 것이죠. 부부생활은 서로가 비슷한 색깔에 물들어가는 기분 좋은 여정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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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도 가야 하니 과식하지 말자는 우리의 야심찬 계획은 물거품이 됐습니다. 온몸에서 뼈다귀 감자탕과 묵은지 냄새가 진동하고 배는 터질 듯 부풀었습니다. 이쑤시개로 고춧가루를 야무지게 빼며 그래도 이왕 나왔으니 카페는 가자고 합니다. 근처 카페를 둘러보니 한 군데가 유독 사람이 많습니다. 저는 사람이 없는 조용한 곳으로 아내를 설득해 끌고 옵니다. 책도 읽고 글도 써야 하니 조용한 곳으로 가야 한다고요. 사람 많은 곳에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서 체할지도 모르고요. 진한 원목 색 나무로 인테리어가 된 카페가 무척 마음에 듭니다. 창가에 앉으니 밖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네요. 제가 생각하던 풋풋한 데이트의 향기가 다시 코끝을 스치는 것 같습니다. 배가 터질듯하지만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달콤한 초코케이크가 술술 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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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랜만에 느껴보는 여유입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달콤한 케이크를 먹으며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을 각자의 방식으로 즐기고 있습니다. 제 삶에서 이런 시간들이 더 많이 채워졌으면 하는 바람이 생깁니다. 제주도에 내려가서 조급함을 버리고 이런 생활을 더 많이 즐겨보자고 아내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뉴질랜드에 살면서 느꼈던 조급함, 불안함은 결코 삶에 도움이 되지 않다는 걸 경험했습니다.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고 그 외의 일들은 알아서 되기 마련이니까요. 제 손을 벗어난 일들에 불안함을 느끼기보단 여유 있게 즐기는 편이 낫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지금의 이 여유를 잊지 말고 제주도에서도 꼭 복습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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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도 이제 끝나갑니다. 학교로 돌아가야 합니다. 카페에서 즐기는 이 달콤한 데이트도 곧 끝나겠지요.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하거든요. 다시 치열한 삶의 현장이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네요. 그래도 이 또한 즐겁습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아야 좋은 거 아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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