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백발 마녀전' (2020.4월)
나는 장국영을 잘 알지 못한다. 아는 거라고는 왕가위 감독의 페르소나였고, 재능이 뛰어난 배우 그리고 가수였다는 것, 안타깝게 돌아가셨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하자면, 장국영의 기일은 나에게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내가 평소에 보지 않던 영화들을 보자는 생각으로 <백발마녀전>을 봤다. 평소에는 보지 않았을 무협 영화라는 점에서 이 영화를 골랐다. 그리고 특별한 이유 없이 ‘백발마녀’라는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마녀라는 소재를 평소에도 좋아하는 탓이었을 수도 있다. 감상문을 쓰기 위해 영화를 본 후 여러 리뷰들을 읽어봤다. 하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긍정적이게 평가하고 있어서 놀랐다. 연인 간의 사랑을 넘어서 인간과 인간 간의 신뢰와 믿음을 주제로 다룬다는 점에서 사람들이 이 작품을 높게 평가한 듯 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이유로 이 작품이 나에게는 모순적으로 다가왔다.
분노, 슬픔, 기쁨, 노여움 등. 우리는 수 많은 감정들을 느끼며 살아간다. 모든 감정은 그의 주인, 그 감정이 살아오며 굳어진 모양, 그가 놓인 상황에 따라 생김새도 색도, 느껴지는 정도와 느낌까지 모두 다르다. 모든 개인과 생물에게 그들만의 고유한 특성이 있듯, 감정 또한 그렇다. 하지만 이처럼 다양하고 서로 달리 생긴 감정들 에게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그 감정에 대한 대상(그것이 꼭 눈에 보이는 대상이 아니어도)이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은 결국 우리의 감정은 ‘관계’ 속에서 피어난다는 것이다.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생물인 이상, 그 생물이 느끼는 감정은 ‘관계’ 속에서 발생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분노를 느끼는 것도 무의 상태에서 갑자기 분노라는 감정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분노의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의 제공자가 있으며, 그 제공자와의 관계에 의해 그 분노라는 감정, 그리고 분노의 모양과 색, 정도와 느낌이 생기는 것이다. 감정은 결국 관계에서 피어난다는 개념(?)은 특히 이야기를 다루는 이야기꾼들로서도 꼭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백발마녀전>은 이 개념(?)을 크게 신경 쓰지 않은 것 같다. 영화 속의 인물들 간의 관계와 그로 인한 감정선에 대해 깊게 고민하지 않았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과 인간 간의 사랑과 믿음, 그리고 그로 인한 배신감을 주제로 다루는 영화에서 인물들 간의 관계와 감정선의 개연성 없이 그저 이야기가 흘러가는 대로만 표현했다는 것이 나에게 매우 모순적으로 다가왔다. 영화의 주제만 봤을 때는 그 어떠한 영화 보다도 인물들의 관계와 감정선을 더욱 세밀하고 섬세하게 다뤄야 하는 영화인데 그렇지 못했다는 점이 너무 아쉬울 따름이었다.
영화는 탁일항(장국영) 그리고 연예상(임청하)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들은 사랑에 빠지지만, 그들 사이에 오해가 생겨 탁일항이 연예상을 배신하게 된다. 배신감에 큰 상처를 받은 무녀 연예상은 백발마녀가 되고 만다. 둘 사이에 오해가 풀리고 탁일항이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던 것이다. 충분히 애틋하고 가슴이 미어질 만한 스토리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감정선이 나에게는 다가오지 않았고 주제 또한 크게 와 닿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탁일항과 연예상의 관계를 충분히 묘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영화의 전반부에서는 탁일항을 설명하는 데에 시간을 지나치게 소요를 했다. 하지만 그에 비해 관객들이 연예상에게 감정이입을 할 만한 시간을 주지 않았다. 또한 두 인물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 또한 갑작스러웠다. 아니, 그냥 과정이 없었다. 그 과정 없던 과정은 이러했다 – 탁일항은 독침에 맞은 연예상을 구한다. 그리고 그는 숨어 그녀가 목욕하는 모습을 몰래 훔쳐본다. 자신이 목욕하는 모습을 들킨 연예상은 탁일항을 죽이겠다며 협박을 한다. 그러자 탁일항이 연예상에게 작업을 걸려고 하고 연예상은 탁일항을 공격한다. 그러자 갑자기 늑대에게 공격을 당할 뻔 했던 탁일항의 어릴 적 과거 회상 장면으로 넘어간다. 탁일항과 약 100m 정도 떨어진 절벽 위에서 한 소녀가 달빛을 받으며 피리를 불자 늑대들은 탁일항을 떠난다. 그리고 그 소녀에게 반한 듯한 표졍의 어린 탁일항을 보여주며 현재로 돌아와 격하게 사랑을 나누는 탁일항과 연예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고는 탁일항은 연예상에게 ‘연예상’이라는 (그녀는 탁일항은 만나기 전까지 이름이 없었다) 이름을 지어주며 서로 사랑을 맹세한다. 무협영화라는 장르에 맞게 장면과 스토리의 진행도 정말 무협처럼 순식간에 지나간다. 관객은 그들에게 감정이입을 할 겨를도 없고, 서로가 사랑하게 된 과정 조차도 묘사가 없어 감정선을 이해하기도 힘들다. 특히나 연예상은 태어난 직후 아버지에게 버려져 늑대들과 자라났고, 그후 마교의 살인 병기가 되어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은 채 외롭게 살아간다. 그러한 인물이 그렇게 한 순간에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어주고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탁일항과 연예상 사이의 감정선 뿐 아니라, 마교 두 쌍둥이 사이의 감정선도 전달이 되지 않았다. 마교 쌍둥이는 서로의 등이 붙은 채로 태어나며 자랐다. 그들은 눕는 것도 옆으로 누워야 했고, 몸이 붙어있어 서로를 마주 볼 수도 없다. 하지만 그들의 육체와 감정이 동화 되어, 한 명이 느끼는 고통이 다른 한 명에게도 그대로 전달이 된다. 이러한 설정만으로도 나는 영화의 주제를 이끌어내면서도 매력 넘치는 인물들과 여운 남는 감정선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러한 매력적인 인물 설정 마저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남동생은 그저 탁일항에게서 연예상을 빼앗는 적, 그리고 누나는 자신의 동생에게 시끄러운 잔소리를 하는 존재로 밖에 남지 않았다. 모든 것을 함께 느끼고 함께 하는 둘은 모양체가 이상하다는 이유로 쌍둥이는 사람들에게서 따돌림을 당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어려움을 함께 헤쳐 나갔지만 정작 동생의 시선은 항상 다른 곳에 있었다. 그는 연예상에게 집착을 하며 자신의 등에 붙어있는 누나를 그저 귀찮은 존재로만 여겼다. 아마 남동생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어떻게든 잊어보려고 외부로 시선을 돌리며, 연예상을 소유하여 과거에 약자로서 받았던 상처를 권력을 통해 묻어두려고 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누나는 그저 둘이 함께 어려움을 헤쳐나가고, 자신들을 버린 세상 속에서 서로만이라도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의지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 육체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항상 같은 것을 느끼지만 정작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자신의 진짜 마음과 생각을 알아 주지 않으며 다른 곳에만 시선을 돌리는 동생 때문에 외로웠을 것이다. 그 외로움은 동생을 향한 미움과 연예상을 향한 질투로 변질 됐을 것이다. 또한 동생이 두 몸의 주체로, 자신의 감정보다는 동생의 감정과 육체적인 반응들을 느껴야 했기에 동생에게도 시기를 하며 그의 정신을 말로 조종하여 그를 망가트리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선 또한 그들의 관계 묘사가 충분치 않아 전달되지가 않아 너무 아쉬웠다. 마교 쌍둥이들의 죽음도 그들의 관계가 충분히 설득력 있도록 묘사가 되었다면, 정말 여운 남는 장면으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등이 탁일항에게 끊어지며 쓰러져 누운 채 “이렇게 누워있으니 편하네.” 라는 대사도 아무런 여운 없이 지나갔다.
영화가 아무리 통찰력과 깊이가 있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주제를 다뤘다 해도 인물들 간의 관계가 제대로 묘사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관객은 영화를 보며 인물들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공감을 하며, 자신들이 느낀 것을 바탕으로 주제를 파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물들의 감정과 감정선이 납득되지 않아 영화를 보는 데에 방해가 된다. <백발마녀전>의 주제와 스토리 그리고 소재는 충분히 여운이 남을 만한 영화였다. 하지만 인물들의 관계와 그 속에서의 감정선이 설득력 있지 않아 여러모로 아쉬운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