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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예술이 시간을 품는 도시에서

세계기록문화유산 취재 중 내가 만난 음악의 영혼들

by 최국만


세계기록문화유산 취재를 위해

오스트리아 빈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 도시가 왜 ‘예술의 심장’이라 불리는지

도착하자마자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빈의 중심가, 케른트너 거리.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로 가득했고

거리의 공기조차 음악의 향기를 품고 있었다.

당시가 마침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

거리의 상점마다 기념품과 음악 상징들이 넘쳐났다.

모차르트의 초상, 황금빛 트럼펫, 바이올린 모형,

그 거리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음악관처럼 느껴졌다.


거리 예술가들은

클라리넷과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관광객을 위한 음악 선물처럼

은은한 선율을 흘려보냈다.


카메라를 어디에 비추어도

그 자체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이곳의 예술은 ‘꾸민 예술’이 아니라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 있는

‘살아 있는 예술’이었다.


예술은 빈 사람들의 태도에서 완성된다

나는 그곳을 걸으며

예술이 이 도시를 만든 것이 아니라

예술을 존중하는 시민들의 마음이

이 도시의 품격을 완성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람들의 표정에는 여유가 있었다.

그 여유 속에서

예술을 대하는 깊은 교양과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들은 음악을 자랑하지 않고,

그저 ‘당연한 일상’처럼 누리고 있었다.


흑사병으로 수만 명이 죽었던

유럽의 비극 또한

예술로 승화시켜 거리 한가운데에 세워두고

그 아픔마저 품고 있었다.

아픔을 외면하지 않되,

아름다움 안에 담아 전하는 그 태도가

나는 참 부럽고 인상 깊었다.


거장들의 흔적을 따라 걸었다.

나는 쇼팽, 베토벤, 슈베르트의 생가를 취재했다.

그들이 살아 숨 쉬었던 방,

낡은 피아노,

창가에 스며 있던 빛 한 줄기까지

모든 것이 기록이었다.


특히 슈베르트의 생가 옆에 서 있던

오래된 보리수나무.

동네 주민은

“이 나무와 우물은 슈베르트가 살던 시절 그대로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

‘보리수(Lindenbaum)’ 가곡의 선율이

바람결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슈베르트의 영혼이

아직 그 나무 아래 어딘가를 걷고 있을 것만 같았다.


위대한 음악가는 왜 그토록 고통받았는가

빈의 음악가는 하나같이 예민했고,

섬세했고,

상처 입기 쉬운 사람들이었다.


쇼팽은 폐결핵과 싸우며

사랑과 예술 사이에서 고독을 이겨냈고,

슈베르트는 31세라는 짧은 생애 동안

600곡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천재라는 이름 뒤에는

늘 사랑의 고통과 결핍이 있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처절한 삶을 산 사람은

단연 베토벤이었다.


비엔나 중앙묘지.

여름 햇살이 뜨거웠던 오후,

나는 베토벤의 묘 앞에 섰다.


누군가 놓고 간 장미 한 송이.

그 꽃은 바람에 흔들리며

마치 베토벤의 영혼을 대신해

나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청력 상실, 극심한 고통,

몸의 장애.

그 모든 절망을 껴안고도

그는 운명 교향곡을 썼다.


“운명이 이렇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다.”


그는 절망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 어떤 악조건도

그의 창조적 의지를 꺾지 못했다.


묘비 위의 흰 대리석과

조각된 악기,

뜨겁게 내리쬐던 햇살.

그 광경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벽한 장면이었다.


예술은 결국 인간의 고통에서 태어난다

사람들은 말한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빈에서 그 말의 뜻을 직접 보았다.

그들은 모두 떠났지만

그들의 음악은 남았다.

삶은 끝났지만

예술은 시간을 넘어

지금도 우리의 감정을 흔들고 있다.


나는 방송을 제작할 때

가장 슬픈 장면에 자주 사용하는 음악이 있다.

‘재클린의 눈물’.

그 음악을 사용할 때면

베토벤, 슈베르트, 쇼팽의 얼굴이 떠오른다.


예술은 그들에게

상처이기도 했고,

구원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상처와 구원의 흔적은

지금도 우리를 울린다.


빈은 나에게 예술이 무엇인지 가르쳐준 도시다

그 음악가들은

자신의 처절한 인생을

음표 하나하나에 새겨넣었다.


나는 그들의 묘지 앞에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들이 걸어간 삶의 길 위에

나는 어떤 이야기를 남길 수 있을까.”


예술은 천재의 것이 아니라

고통을 견딘 사람의 것이다.

그리고 기록은

그 예술을 영원에 남기는 인간의 방식이다.


빈은 나에게

예술이란 결국

시간을 넘어 인간의 마음을 건너가는 일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했다.


나는 그 도시를 떠나오면서

카메라에 담은 것은 풍경이 아니라

인간이 남긴 영혼의 흔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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