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우림, <VAMPIRE>
혹시 수수께끼를 좋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의 경우엔 풀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면 꿈에서도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건 자우림 12집의 <VAMPIRE>였습니다.
이 노래의 이전 트랙인 <마이걸>은 존엄과 생존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당장 도망치라고 말합니다.
https://youtu.be/Ox1vVwPkcaM?si=cmh-883Vzq66CzDV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야
My girl
I don't wanna lose you
Run away, run away
그리고 <VAMPIRE> 다음 곡은 <카르마>입니다. 힘을 되찾은 그 사람은 가해자에게 업보가 돌아갈 거라 경고합니다. 더 이상 자신을 탓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요.
https://youtu.be/HrMy36iyuXg?si=8CYfV_nIE4VmsG_u
끝나지 않는 악몽 속에선 꿈속인 줄도 몰랐었잖아
Karma, karma, karma
Karma’s chasing you
더는 널 견디지 않아
그렇다면 '뱀파이어'는 극단적인 위협 상황을 탈출한 후에 마주치게 되는 존재이며, 그 만남은 가해자에 대한 유예된 분노를 불러일으킨다고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마음속으로 답을 정했지만 그것의 실체는 너무도 복잡합니다. 만약 제가 만난 뱀파이어를 증오하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하겠습니다. 가해자가 사라진 후에도 그것은 늘 함께 있었으니까요. 그러다 어둠이 내리면 어떠한 설명도 듣지 못한 채 그때 그 모습 그대로 튀어나올 뿐입니다.
과거 나를 위해 죽었고 미쳐 있으며 그렇기에 삶을 방해하는 이 피투성이 괴물의 이름은 '트라우마'입니다.
때로 고통이 영혼을 조각낸다는 건 비유가 아닙니다. 심리적 고통을 주는 상황에서 오래 견뎌야 하면 자아는 생존하기 위해 '분리'라는 전략을 사용합니다. 일부분을 떼서 지금 겪는 괴로운 감정을 몰아주고, 대신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자아를 보호합니다. 이렇게 분리된 자아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도 트리거가 발생하면 그때와 동일한 감정을 느낍니다.
이때는 평소엔 이성적이고 현명한 '어른 자아'라도 강렬한 감정에 휘말려 중심을 잡지 못하고 융화되곤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 자아의 일부분으로 담지 못한 고통은 '감정기억'으로 남아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납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극도의 공포가 치솟으며 일순간 전투태세에 빠집니다. 이토록 생생하게 느껴지는데 실제로는 위협이 없다는 건 믿기 힘든 일입니다.
심리 상담은 기본적으로 자아는 하나이며 통합되어 있다는 관점을 가져가지만, 트라우마에서만큼은 다른 관점이 적용됩니다. 어느 부분에서 우리는 조각난 자아의 집합체입니다. 지금 느끼는 이 비이성적인 감정과 생각은 나의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사실을 인정해야만 고통에 휘말리지 않고 다른 자아를 도울 수 있습니다. 마치 다른 사람에게 연민을 베푸는 것처럼요.
하지만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얼어붙는 공포나 죽일 듯한 증오에 휩싸일 때마다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부분' 자아의 목소리는 들릴 듯 말듯할 뿐이었습니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그리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모든 건 너의 탓이라고 말하고 싶었으니까요. 그때 그 상황을 더 낫게 만들지 못한, 무력하게 고통받기만 해야 했던 '나'의 잘못이라고. 그러니 현재의 삶을 그만 방해하라고 화를 내고 싶기도 했습니다.
자우림의 <VAMPIRE>가 노래한 것처럼, 시간이 멈춰버린 부분에도 애도를 건넬 수 있을까요. 견딜 수 없어서 부서졌기 때문에 이만큼 나아갈 수 있었다는 걸 기억하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네 잘못이 아니었다는 말 같은 게 아닙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도록 지켜줘서 고맙다고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https://youtu.be/LoJrIEdmmMc?si=l9f0T4uXfExHt6N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