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도시에도 가끔은 비가 온다. 지상의 기후처럼 보이게 하려고 중앙의 인공지능이 마술을 부리곤 한다. 기분을 산뜻하게 만들어주는 이슬비나, 재즈 음률에 어울릴 법한 나른한 빗줄기, 마음을 상쾌하게 뚫어줄 시원한 바람……. 어느 것도 지상처럼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지만, 지하 시민들의 기분을 전환해 주고, 아주 조금은, 기분 좋은 불편을 만들어내는 요소다. 심지어 일기예보가 틀리는 경우도 있다. 루시가 조정하는 기후 메커니즘임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오차를 주어 만사가 자기 기분대로 흘러가지 않음을 지하 시민들에게도 알려주는 것이다. 지하의 모든 것은 지상을 흉내 내고 있지만, 그 끔찍하고 혼란스러운 기후까지 완벽하게 구현하지는 않는다. 불편과 변덕이 있더라도 그 모든 것은 통제된 범위에서 발생하는 이벤트(event)에 불과하다. 마치 게임 속 세상처럼…….
대통령의 연설이 예정된 목요일 아침, 언제나처럼 맑고 쾌적한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일기예보대로 시야는 맑았고 바람은 강하지 않았다. 연설장 부근에 모인 사람들은 8월임에도 20도 내외의 쾌적한 기온과 살을 간지럽히듯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행사장에서 1km가량 떨어진 거리에서 대통령 지지자와 반대자들의 맞불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의 소음은 이곳까지 들리지 않는다.
클론 경찰대가 대규모로 투입되어 지키고 있는 도로 위로 드디어 대통령이 탄 차량의 행렬이 보이기 시작한다. 대통령의 차 앞으로, 큰 차량 상단에 실린 경비용 안드로이드의 상반신이 먼저 모습을 드러낸다. 안드로이드의 표면인 은빛 금속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다. 행사장 주변 곳곳에 저격수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공중에도 자율형 드론들이 수시로 비행을 하며 주위의 위험 요소들을 감지하고 있었다.
이윽고 대통령이 모습을 드러낸다. 얼굴 곳곳에 주름살이 있고 피부도 변색된 부위가 많지만, 금발의 60대 남자는 여전히 에너지가 넘쳤다. 그는 자신의 거구를 ‘야수(The Beast)’라 불리는 차에서 빼내, 힘찬 걸음으로 연단을 향해 걸었다. 연단 앞을 채운 VIP 참석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로 그를 맞이했다. 행사장을 채운 방송국의 카메라들도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하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자리에 참석해 주신 유진 하원 의장님, 센트럴 로봇의 마이클 회장님, 타이탄 바이오닉스의 CEO이자 나의 가장 친한 친구 톰을 비롯해 수많은 내빈 여러분, 그리고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 나는 이 자리에 엄청난 위기감을 가지고 섰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엄청난 위협에 처해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라를 뒤흔드는 세력들, 무능력한 정책으로 경제를 바닥으로 추락하게 만든 관료들, 바이러스와 오염물질을 생산하는 독재국가 중국, 우리 체제를 위협하며 테러와 학살을 서슴지 않는 반군들, 우리 문명의 근간을 부정하는 얼치기 아나키스트, 가정과 도덕의 가치를 부정하는 태아 살인자들……. 이 모든 것들이 지금 백악관을 포위하고, 나라의 심장에 총을 겨누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 지경인데, 노쇠한 워싱턴의 엘리트들은 클론 생산을 줄이고 중국과 화해를 하라는 한가한 소리를 합니다. 또는 불타는 대지 위로 복귀하여 이전의 문명을 다시 일으키자는,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소리들을 합니다. 그 말을 하는 자들조차 믿지 않는, 듣기 좋은 말들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며 나라를 뒤흔듭니다. 위선자들이죠. 그들은 클론들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란 말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가요? 그들은 매일 클론을 겁탈하며, 자신들의 동류인 하프-클론을 생산하는 데 여념이 없죠. 순수한 인간의 피를 클론과 뒤섞으려는 것입니다. 한 세대가 가기도 전에 이 나라를 클론들이 다스리게 만들려고요.”
역시나 대통령은 연설물은 집어치우고 생각나는 대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행사장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은 대통령의 농담에 박수를 치며,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의 얼굴에 활기가 돌자, 대통령은 자신감을 얻었다. 원래도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었지만.
“중국 사람들이 과연 말을 들을까요? 그들은 말을 듣지 않아요. 중국어는 물론이고, 영어는 더욱더 듣지 않죠. 마오쩌둥이 그랬답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그래요. 중국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다 총으로 해결합니다. 도대체 그런 자들과 어떻게 대화를 하라는 것인가요? 차라리 이슬람 국가들과 대화하는 것이 낫죠. 나는 이전 정부가 물려준 똥통(shithole)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만들어놓은 국제적 역학 관계와 이미 숨이 끊어져버린 경제 속에서요. 더 이상 나는 참지 않을 겁니다. 그 똥통 같은 나라(the shithole country)에 전 정부가 남겨놓은 똥통을 발로 차 넘겨줄 겁니다. 잘 보세요. 저는 누구보다 탁월한 스트라이커니까요.
여러분, 여전히 대통령의 정당한 권한 행사를 막고 있는 딥 스테이트(Deep state)가 곳곳에서 마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의 협잡과 음모에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벌써부터 부정 선거의 손길이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습니다. 위대한 미국을 쓰러뜨리고, 민주주의를 빼앗으려는 음모가 이미 곳곳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절대로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위대한 미국의 힘을 이용해 중국의 독재국가 야수를 길들일 것이고,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것입니다. 나는 언제라도 내 책상에 있는 커다란 핵 버튼을 사용할 의향이 있습니다. 공화당 인간들은 언제나 겁을 내며 주어진 힘을 사용할 줄 모르지만, 난 언제라도 베이징을 향해 더 큰 핵탄두를 날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핵 버튼을 바라보며, 다리를 떨며, 침을 흘리는 것뿐입니다. 난 다릅니다. 국민 여러분, 조만간 내 모든 말들이 헛된 구호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습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었다. 신이 난 대통령은 계속 말을 이어가려 했다. 언론은 대통령의 말을 전하며 ‘혐오’와 ‘갈등’을 조장하는 대통령이라며 비난하겠지만, 페머트 대통령은 그런 비난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남자였다. 그는 손을 들어 관중들의 환호에 화답하고 다시 연설을 이어가려 했다.
그때 어디선가 총성이 들렸다. 하지만 소리가 작아 총성은 환호에 묻혔고, 그것을 알아들은 이는 없었다. 경호원 클론 몇이 몸을 움찔거렸을 뿐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총성이 들리며, 대통령 앞에 서 있던 경호 클론이 쓰러졌다. 그의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저격을 감지한 경호원들은 대통령을 재빨리 둘러쌌다. 경호 클론 중 하나가 대통령의 머리를 손으로 잡고 그의 몸을 강제로 숙였다. 거구의 대통령은 커다란 철제 연설대 뒤로 몸을 숨겼다. 그때 다시 여러 발의 총성이 들렸다. 객석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머리를 숙이며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총성이 들렸으나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총성은 사람들의 고함 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잠시 후, 그 혼란에도 불구하고 경호원들은 대통령의 몸을 손으로 받치고 서둘러 차량을 향해 달려갔다. 경호원 두 명이 대통령의 상체를 받치고, 한 명이 그의 다리를 잡은 채, 몸이 축 늘어진 커다란 사자를 나르듯, 그들은 있는 힘껏 대통령의 전용 차량을 향해 달렸다. 다른 경호원 한 명이 대통령의 머리에 손수건을 대고 있어서 정확히 보이지 않았지만, 손수건에는 붉은 피가 묻어있는 것 같았다. 짐짝처럼 ‘비스트’에 대통령이 실리자 수 대의 차량이 한꺼번에 현장을 떠났다.
페머트 대통령이 야심차게 준비한 연설은 그렇게 한바탕 소란 속에서 끝이 나고 말았다.
방송사들은 일제히 ‘대통령 피습’ 사건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백악관에서는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았고, 방송사들은 현장에 잡힌 화면을 보며 여러 분석과 추측을 내놓았다.
“저거, 피 아닌가요?”
머리를 짧게 자른, 얼굴이 조금 긴 남자 앵커가 피습 당시의 화면을 보며 함께 자리한 남자에게 물었다.
“네. 화면상으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통령이 부상을 당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각도가 안 좋아서 얼마나 큰 부상인지는 알 수 없군요.”
앵커 옆의 뚱뚱한 남자가 대답했다. 앵커는 정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까지 백악관에서 나온 설명은 없습니다. 백악관 입장이 나오는 대로 시청자 여러분께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광고 보고 오시죠.”
화면에서는 앵커의 모습이 사라지고 가정용 안드로이드를 소개하는 광고가 나오기 시작했다. 화면 하단에는 ‘풍부한 감정 표현. 숙달된 가사 처리’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휴일이라 거실에 앉아 여유롭게 TV를 보고 있던 탱크는 벨 소리를 듣고 함께 소파에 있던 료마에게 말했다.
“서재로 가서 받을게.”
료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탱크가 서재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그의 머릿속 프로세서를 작동시켜 전화에 연결하자 곧바로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벨 소리가 사라졌다.
“프랭크. 비상 상황이야. 빨리 백악관으로 오게. 안보 회의가 열릴 거야.”
고든 장군의 비서 데이비드 대령이었다. 탱크는 서둘러 침실로 들어가 군복을 꺼내 입고 거실로 나왔다. 그 사이 하연과 린이 집으로 들어섰고, 다른 가족들도 어느새 거실로 나와 있었다.
“다녀올게. 금방 돌아올 거야.”
탱크의 말에 하연은 그에게 다가가 포옹으로 그를 보내주었다. 밤금 밖에서 돌아온 하연과 린 말고도, 료마, 민수와 마리, 그리고 클라라까지, 가족들은 모두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탱크가 집을 떠나고 가족들은 거실에 모여 앉아 TV를 봤다. 뉴스에서는 여전히 대통령 피습 사건에 대한 보도가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