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영내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 앉아서 멍하니 눈앞의 풍경을 바라본다. 정류장에는 아무도 없다. 읍내로 가는 버스 시간은 아직도 30분이나 남아 있었다. 녹색의 플라스틱 의자는 엉덩이가 무척 배겼다. 이리저리 자세를 바꿔가며 앉아보지만, 금방 엉덩이가 아려온다.
전주로 갈 생각이었다. 읍내의 시외버스 터미널로 가서, 그곳에서 전주행 버스를 탈 것이다. 토요일 저녁은 전주에 예약해 놓은 숙소에 머물기로 하였다. 한옥 마을에 있는 아담한 곳이었는데 인터넷으로 예약을 해두고 이미 결제까지 해놓았다. 다른 것은 모르겠고, 이젠 그냥 혼자 있고 싶었다. 예약해 놓은 1인실 안으로 들어가, 세상모르고 소주나 한 잔 마시며 TV나 봤으면 좋겠다 싶었다. 재미없고 멍청한 막장 드라마라면 더 좋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정류장에 우두커니 앉아있는데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나 말고 버스를 타려는 누군가 있는가 보다 하고 고개를 돌렸는데, 그곳에는 시우란 이름의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터벅터벅, 자신의 검은색 워커를 끌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내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아저씨는 어디로 가세요?”
그녀가 잠깐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려 정면을 보면서 내게 물었다.
“나요? 난 읍내로 가요.”
“거기서는 어디로 가는데요? 이제 서울로 올라가세요?”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니, 그녀에게서는 아무런 의욕도 느껴지지 않았다. 여자는 죽은 생선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전주로 가려고요.”
내 말에 그녀가 나를 바라봤다.
“어디요?”
“전주요. 전라북도 전주.”
“아…….”
그녀는 다시 앞을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뭔가를 꺼내고는, 내 앞에 손을 펼쳐 보였다.
“이것 좀 드실래요, 초콜릿인데?”
그것은 은박지 같은 것에 포장된, 작은 종 모양의 초콜릿이었다. 나는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건네며 초콜릿을 두 개 건네받았다. 그리고 포장지를 손으로 까서 초콜릿을 입에 넣었다. 초콜릿을 녹이니 안에서 아몬드가 씹혔다.
그 이후 그녀는 별말 없이 버스를 기다렸다. 기다리던 버스가 오고 우리 두 사람은 읍내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나는 버스 앞쪽 자리에, 그녀는 뒤쪽 자리에 앉았고, 버스 기사가 어디까지 갈 거냐는 물음에 내가 “시외버스 터미널이요. 읍내.”라고 대답한 이후에는 더 이상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갔다.
토요일 오후의 터미널은 전날보다 북적였다. 휴일을 만끽하는 고등학교 남학생, 여학생들 무리가 더러 보였고, 남녀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우루르 몰려다니는 학생들도 보였다. 손에 한가득 보따리를 짊어진 촌로들과 신사모를 쓰고 술 냄새를 풍기며 지나가는 아저씨, 상경(上京)하는지 멋지게 차려입은 아가씨까지, 터미널은 다양한 사람들을 맞으며 활기를 되찾고 있었다.
내가 터미널 안에 설치된 발급기에 서서 표를 끊으려 할 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다른 발급기가 비어있는데 굳이 내 뒤에 서는 건가,라고 생각하며 뒤를 돌아봤을 때, 그곳에는 시우가 서 있었다.
“몇 시 차 타실 거예요?”
“네?”
“전주 가는 버스요. 몇 시꺼 타실 거냐고요.”
“아…… 아마도…… 4시 30분 차요.”
“전주에 가면 뭐 볼 게 있어요?”
“글쎄요. 저도 자주 가본 곳은 아니라서…….”
“그럼 이번에는 뭘 보러 가는 건데요?”
“전 그냥, 당장 집에 가기는 그래서, 하루 더 시간 때우다 가려고요.”
그녀는 더 물어보지 않고 옆에 있는 발급기로 가서 표를 끊기 시작했다. 나는 4시 30분 버스표를 끊고 터미널 안에 있는 대합실로 가 앉았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도 대합실로 들어와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오전에 마신 술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고, 살짝 여자 향수 냄새가 느껴졌다.
대합실에 앉아 멍하니 TV를 보고 있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게 말했다.
“여기 가방 놓고 갈 테니까 좀 봐주세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그녀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아마도 화장실에 가는가 보다 생각하고, 그녀의 검은색 백팩에 손을 올리고 있는데, 어디서 사 온 것인지 두 손에 일회용 컵 두 개를 들고 그녀가 나타났다. 그녀가 컵 하나를 내게 건네며 말했다.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그냥 아메리카노로 사 왔어요. 따뜻한 거. 혹시 얼죽아?”
“얼…… 뭐요?”
“하하. ‘얼어 죽어도 아이스’냐고요.”
그녀가 웃으며 대답했고, 나는 그제야 그녀의 말을 알아듣고는 “아뇨. 아무거나 잘 마셔요.”라고 대답했다. 4시 20분이 되자 플랫폼으로 전주행 버스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일어서자 그녀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고, 내가 전주행 버스가 있는 곳으로 가자, 그녀도 내 뒤를 따라 그곳으로 왔다.
내가 그녀를 보며 물었다.
“혹시…… 이거 타실 건가요?”
“네. 저도 전주에 한 번 가보려고요.”
“아…….”
그녀의 자리는 버스 오른쪽 뒷자리였고, 내 자리는 왼쪽 중간 자리였다. 내가 자리에 앉아 비어있는 옆좌석에 가방을 올려두자, 누군가 내 뒷자리로 들어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뒤로 돌려보니 그녀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눈웃음을 짓고는 자리에 앉아 귀에 무선 이어폰을 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왜 갑자기 그녀는 전주로 간다는 것일까? 고양이 같은 여자였다. 무슨 생각으로 움직이는지, 왜 그렇게 하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여전히 눈동자에는 별다른 열의가 담겨 있지 않은 것 같으면서, 어쩌다 한번 움직일 때는 요란하게 눈동자에 불을 켜고 움직인다. 나는 감이 잡히지 않아 커튼이 반쯤 열린 차창을 멍하니 바라보기 시작했다.
1시간 반을 달려 버스는 전주에 도착했다. 내가 먼저 버스에서 내리니 그녀가 곧이어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내게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요?”
“네?”
“어디로 가서 놀 거냐고요?”
“아니……. 나는……. 숙소 잡아둔 곳이 있는데…….”
내가 어물쩍거리며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자 그녀가 내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우리, 어디 가서 술이나 한 잔 해요. 여긴 어디에 술집이 많은가?”
군대에 있을 때 가끔씩 전주에 올 일이 있기는 했으나, 군용차에 실려오는 몸이라 시내를 돌아본 적은 없었다. 내게도 전주는 초행길이었다.
“글쎄요. 그럼 이 근처 어디서 간단하게 밥 먹으면서 한 잔 할까요?”
예약한 숙소에는 8시 전에만 들어가면 되고 어차피 저녁도 먹어야 할 것 같아서 나는 그녀에게 그렇게 권했다.
결국 우리 두 사람은 터미널 근처에 있는 순댓국 집을 찾아서 들어갔다. 질겅거리는 돼지 내장을 씹으며 우리는 밥과 술을 먹었고, 술이 뱃속을 뜨겁게 덥히자, 이상하게 방금 전까지는 나오지 않던 말들이 술술 나오기 시작했다.
“여기 한 병 더 주세요.”
그 말과 함께 여자는 자신의 연애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고, 나는 나대로 왕년에 드럼을 쳤던 이야기, 영혼을 탈곡해 버리는 중소기업 회사 생활 이야기 따위를 풀어놓았다. 그리고 또 한 병 추가. 한 병 추가……. 술은 술술 목을 타고 넘어갔고, 이야기도 술술 풀렸다. 우리 두 사람의 이야기가 서로 몸을 꼬으며 분위기는 한층 더 달아올랐다. 한 병 더! 또 한 병 더! 몇 병을 마신 것일까? 세다가 결국 포기하고, 전주 시내 어느 국밥집에서, 처음 이야기를 나눠본 여자와 함께, 나는 밤새 술을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