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자리를 뺏지 않기
시인의 강연이 끝나고 질문 타임이 됐을 때 제일 먼저 손을 들었다.
"저는 소설가인데 덜어내는 것의 중요성을 점점 더 느낍니다. 시는 소설보다 덜어내는 게 더 중요할 것 같은데 시인 입장에서 덜어냄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어제도 덜어냄에 실패한 뒤 혼자 창피해 하다가 잠들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어떤지 물어보고 싶었다.
시인은 퇴고 할 때 멋있어 보이려고, 혹은 있어 보이려고 썼던 문장을 지운다고 했다. 하지만 소설은 장면을 써야 하기 때문에 브릿지를 많이 만들어서 촘촘하게 짜는 게 중요할 텐데, 그 중 몇 개는 일부러 덜어내 보라고 권유했다. 그래서 읽는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는 틈을 주라고.
많이 들었던 말이지만 새삼스레 와 닿았던 이유는 문득 나도 이제 틈을 낼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고 인지했기 때문일까?
습작생 때도 선생님께서 같은 말을 하셨다. 글에는 군데군데 틈을 주어야 한다고. 어떤 부분은 읽는 사람을 위해 일부러 느슨하게 써야 한다고. 그때는 구조에 엄청 공들일 때라 그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완벽함이 전부가 아님을 깨달은 후, 틈이란 '마음의 자리를 뺏지 않는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내 욕심을 덜어낸 자리에 타인의 마음이 앉을 수 있는 빈 의자를 놓는 것이다. 누구든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서 자기만의 세상에 푹 빠질 수 있도록.
글은 결국 매개이고 새로운 세상은 자기 안에서 열리고 있을 텐데, 글을 썼다는 이유로 그 틈에 낄 수 있다면 기꺼이 듬성듬성 틈을 내주고 싶어진다. 이런 마음과 별개로 틈 내기가 아주 어려운 기술이라 그렇지. 인생이든 글이든 덜어내는 게 제일 어렵다.
겨우 내놓은 빈 의자에 뭐라도 채워 넣고 싶을 때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가장 중요한 손님이 앉을 자리를 뺏지 말자고. 마음이 또 다른 마음을 데려 온다고. 그러니 빈 의자에서 손 떼고 멀찍이 떨어진 내 자리에서 앞으로 틈틈이 벌어질 일들을 황홀하게 감상할 준비나 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