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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루 Feb 13. 2024

'어른이기 때문에' 참는 것은 그만하자

학교에서 도망치는 선생님



"학교는 가장 안전한 곳이어야 한다."라는 말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교사가 되어 학교에 와 보니 학교는 아이들의 안전에는 관심이 많지만 어른의 안전에는 너무도 무관심한 곳이었다. 학교는 아이들을 위한 곳이니 당연하다. 하지만 아이들을 돌보는 어른이 위태로운 상황이라면 그것은 곧 그 아이들의 위험이 된다. 이것 또한 당연하다. 하지만 어른이 위태로운 상황은 아이와 다르게 도움받기가 쉽지 않다. 학교에서의 교사는 어른이고,  교사는 어른이기 때문에 스스로 돌보고 관리할 줄 알아야 하며, 교사는 어른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대변해 주기보다는 스스로를 옹호하여 문제상황을 헤쳐나가야 한다.

 

사실 '어른이기 때문에'라는 말로 고통받는 어른은 교사뿐만은 아닐 것이다. 세상의 모든 어른들은 '어른이기 때문에'라는 이 두 단어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혼자 참아내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버텨낼 힘이 없다. 그래서 어른답지 못한 어른이 되기로 했다. 내가 내 삶을 포기하기 전에 아픔을 참아내는 것을 먼저 포기하고, 직장에 다니는 것을 포기했다.


아직 학교에 교사 의원면직을 신청한 것은 아니라서 퇴사를 한 것은 아니다. 나는 현재 병가를 내고, 동시에 공무상 병가를 인정해 달라고 신청해 놓은 상태이다. 공무상 병가 인정 여부와 상관없이 나는 2024년 1학기를 병가, 병휴직을 사용하여 쉬려고 한다. 나는 아직 교사로서 계속 근무를 할 수 있는지, 하고는 싶은 것인지, 그 어느 것도 확실히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 나는 숨 쉬며 또 하루를 보내고 있으니 결정은 얼마든지 미뤄도 되지 않을까.




내가 무엇을 이유로 병가를 쓴 것인지 누군가는 추측을 해 보았을 것 같다. 위에서 말한 '어른이기 때문에' 혼자 많은 어려움을 참아내던 게 과거의 나였다. 특수교사로서 장애학생들을 가르쳤고, 학교폭력 전담교사로서 모든 학교폭력업무를 혼자 도맡았다. 그 학교는 우리 도에서도 특히 많은 학교폭력 사안이 발생하던 학교였다. 끝없이 밀려드는 과도한 업무들과 지속적인 악성민원을 겪으며 나의 삶을 잃었었다. 그렇게 정신의학과 첫 상담에서 나는 입원을 권유받았고, 학교를 관뒀다.


그래도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좋았다. 학폭업무를 맡았었던 학교는 워낙 힘들기로 유명한 학교였기 때문에 다른 학교는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1년 반 정도가 지난 후 나에게 찾아온 기회를 따라 다시 교사가 되었지만, 새로운 학교에서 갑질 관리자를 만났다. 이미 2번의 갑질신고를 통해 우리 학교에 온 분이었다. 나는 1년 가까이 괴롭힘을 견디다 결국 갑질신고를 하였지만 그 후에도 나의 환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조금씩 나아진 것이 있었다면,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고통을 참기만 하였었지만 고통의 경험이 하나 둘 쌓일수록 혼자서는 버텨낼 수 없다는 것을 더 빠르게 인정하게 되었고, 주변에 도움을 청해도 도와주지 않는다면 또 다른 곳에 다시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모두가 고통스러웠던 순간들이었으나 이렇게 되돌아보니, 그때의 나도 살고 싶었나 보다.


그 당시, 내가 혼자 버텨내고 있던 시절에는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는다.'라고 생각했었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작은 도움일지라도 나에게 손길을 내밀던 사람들이 있었고, 도와주지는 못해도 함께 슬퍼해준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의 나는 그 사람들 덕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반대로, 버텨내고 있는 나를 더 힘들게 만들었던 사람들이 있다. 사소한 말 하나하나가 칼날이 되어 나를 찔렀고, 숨이 막혔다. 나를 괴롭혔던 것은 과도한 업무와 악성 민원 학부모, 학교 관리자들이었지만 가장 크게 상처를 준 것은 동료 교사들의 태도 때문이었다. 나쁜 사람들은 나쁜 사람이니 나에게 상처를 준다지만, 내가 믿고 있던 동료교사들이 나의 아픔을 방관하거나 재미난 이야깃거리쯤으로 여기며 이야기하는 것이 더 힘들었던 것 같다.




어디에선가 '학교폭력 멈춰!'라고 외치는 학교폭력 예방 캠페인을  한번쯤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방관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가지고 '멈춰!'라고 외친다면 폭력을 멈출 수 있다는 캠페인.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학교폭력 예방교육을 실시할 때도 '다른 사람의 일이라고 방관하지 말고 돕자. 도울 수 없다면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알려주자.'라는 것을 강조한다.


아이들에게는 그렇게 가르쳤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어른의 입장에서도 어려운 것 같다. 나의 동료교사들도 내가 부당한 일을 당하고 있어도 앞에서는 방관하고, 뒤에서는 쏙닥 거렸다. 더군다나 내 앞에서마저 아무렇지 않게 그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면 더 힘들었다. 나에게는 아직 회복되지 않은 일들이었고, 웃으며 넘길 이야기 주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괴롭힘을 당하는 주체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고 가정했을 때, 나는 그를 위해 앞장서서 도울 수 있었을까? 아직 그런 상황을 마주친 적은 없어서 확실한 답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동료 교사들을 무작정 탓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아무도 나에게 사과한 사람이 없고, 그들에게 나 대신 사과를 요구했던 사람도 없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더 힘들다며 외쳤고, 억울하다며 호소했다. 그들은 이미 나에게 돌을 던지고 스쳐 지나갔다. 앞으로 평생 마주치지 않을 사람도 있고, 또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사람도 있다. 분명한 건 그들은 앞으로도 나에게 사과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미 지나간 사람들이고, 눈앞에 있더라도 이미 지나간 일로 계속 화를 내고 있을 수는 없다. 어쨌든 나도 직장인이고, 일을 하려면 모든 사람들과 원만히 지내야 하기 때문이다.





내 안에는 학교에서 근무하며 쌓인 분노와 억울함이 너무 많다. 대체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학교에서 근무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을 겪지 않았을 텐데라고 생각한 적도 많다. 2023년 여름, 어린 선생님의 마음 아픈 사건이 뉴스를 떠들썩하게 하던 시기에는 그 분과 나의 과거의 일들이 겹쳐 보여 불안감이 극에 달했다. 모든 일상생활이 어려웠다. 그렇게 한 달 쯤 지나 용기를 내어 서울 집회에 참석했을 때, 많은 선생님들과 함께 눈물 흘리며 그곳에서 위로를 받았다. 계속 갈까말까 망설이기만 했던 집회에 다녀온 후 불안감이 조금은 희망으로 바뀌었다. 그 후 나는 2000명가량의 교사 앞에서 한 명의 교사로서 발언을 했고, '앞으로 또 무슨 일이 생긴다면 못 버틸 자신이 있어서 무섭다'라고 말했다. 몇 달 뒤에는 교육정책연구소의 갑질정책 TF팀을 만나 사례자 면담도 진행하였다. 내가 겪은 일이 그냥 그런 일로 지나가기보다는 조금이라도 학교 환경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일이 된다면 덜 억울할 것 같기도 했다.

 

그 후, 교육청에서는 교사들에 대한 심리치료 지원을 강화하였다. 변화의 시작인 걸까? 앞으로의 교직 생활은 지금껏 겪어온 것과는 다를 것이다는 약간의 기대감도 생겼다. 하지만 그런 기대감으로는 더 이상의 교직생활을 버텨낼 수 없을 만큼 나는 많이 무너져있었다.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던 지금의 학교에서 벗어나 타 지역으로 가고 싶었지만, 혹시나 너무 먼 곳으로 가면 출퇴근이 어려울 듯하여 원하는 지역이 아니면 지금의 학교에서 근무하려고 했다. 그러나 인사이동은 실패했고 나는 또 지금의 학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너무도 숨이 막혔다.

 




학교에 출근할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혀오던 것은 최근뿐만이 아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3월에 출근하면 죽는다는 생각이 가득 찼다. 학교를 옮기지 못하더라도 좀 속상하기만 할 뿐 충분히 다닐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나의 생각보다 내 마음은 더 많이 무너져있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인사서류를 쓸 때는 참을만했었더라도 그 후 학기 말에 관리자에게 들은 말 때문에 참을 수 없어진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작년에 선생님만 힘들었던 게 아니라 나도 힘들었다. 내가 징계받아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느냐'라는 관리자의 말. 잊을 수가 없다. 본인이 다른 관리자의 갑질을 방관하여 징계를 받은 것인데, 피해자인 내 탓을 하다니. 그런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직접 듣고 나니 나의 억울함은 더 커졌다.



그래서 나는 병가를 썼다. 

학교에서 다른 교사들을 볼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혀서. 교사지만, 어른이지만 학교에서 도망쳤다.

우선은 나의 몸과 마음을 돌보고자 한다. 병가를 다 쓰고도 회복하지 못하면 병휴직을 쓸 예정이다. 병휴직을 다 쓰고도 회복하지 못한다면 의원면직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주저앉고 싶지 않다. 세상에는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를 위해주는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하기에, 그리고 과거에 비해 나는 더 단단해지고 있기에 이번에도 잘 이겨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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