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황금수레 01화

팬데믹이 떨궈준 선물

by 조병인

눈꺼풀이 저절로 내려앉는 계절의 오후 2시다.

올해 일흔 살인 황윤차 영감이 뒷짐을 지고 책장 앞에 꼿꼿이 서있다.

이삿날이 정해져서 다시 안 볼 책들을 처분할 방법을 궁리하는 중이다.

황영감은 전에도 같은 일을 두 차례 겪은 적이 있다.


한 번은 10년 전에 정년퇴직하면서 직장의 연구실에 가지고 있던 책들을 후배 대학원생들에게 나눠주었다. 책들의 은혜를 저버린 것 같아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오래 아껴줄 주인들에게 입양시켰다고 생각했다.


또 한 번은 50살 되던 해 와인에 홀려서 10년 넘게 사들인 와인서적들을 와인업계에 종사하는 후배에게 무료로 모두 주었다. 그때도 각별히 친했던 벗들이 떠난 것 같아 마음이 허전했지만 더 좋은 주인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책들을 나눠줄 사람도 통째로 받아줄 사람도 떠오르질 않는다.

마음 같아서는 아들에게 물려줘서 젊어서 재테크를 하게 하면 제일 좋은 것 같은데 선뜻 마음이 내키질 않는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마음만 다칠 수도 있고 며느리의 생각도 미지수다.

황영감은 책장 문을 열고 제목이 적혀있어야 할 곳에 굵은 용수철이 감긴 낡은 노트를 꺼냈다.

겉표지에 굵은 붉은색 매직펜으로 ‘보물지도’라고 크게 적혀있다. 5년쯤 전에 경제적 자유를 꿈꾸며 주식투자를 시작한 뒤로 맞닥뜨린 희비애락, 산전수전, 우여곡절, 파란만장이 오롯이 담긴 기록물이다.


황영감은 책상 앞에 선 채로 노트의 표지를 넘겼다.



2021년 2월 1일.

달력을 넘기기 전에 그날이 언제였는지 짚어봤더니 1월 5일이다.

그다음부터 시제가 한 달쯤 전으로 바뀌었다.

가볍게 아침식사를 마치고 텔레비전을 켰다. 화면이 뜨자마자 등골이 오싹한 뉴스가 눈동자를 키웠다.

정규방송도 종편방송도 모두 지구촌을 뒤덮은 ‘죽음의 공포’를 바쁘게 날라다 시청자들의 눈과 귀에 욱여넣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세계 각지에서 고령의 노인들이 매일 무더기로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코로나19로 전국에서 917명이 사망하였고, 일본은 3,456명, 미국은 347,880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무서워서 못 보겠어요.”

옆에서 함께 뉴스를 보던 아내가 양쪽 어깨를 움츠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거실 소파에 홀로 남겨진 나는 만약 나도 감염돼서 곧 죽을 상황이면 가장 후회되는 일이 무엇 일지를 떠올려봤다.

지나온 70년을 돌아보니 반드시 꼽아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첫째. 부모님 살아생전에 효도다운 효도를 한 번도 못했다.

둘째. 헌신적으로 도와준 형제들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했다.

셋째. 내가 가진 마음·시간·돈을 더 가치 있게 쓰지 못했다.

넷째. 젊었을 때 지식과 경험 축적에 소홀하였다.

다섯째. 좀 더 많은 시간을 독서에 할애했어야 했다.

여섯째. 사는 동안 종교와 신앙을 가져보지 못했다.

일곱째. 내 음성이 성우 같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여덟째. 자산증식을 위한 재테크에 무관심했다.


며칠 뒤에 텔레비전을 통해 우연히 존리(John Lee, 한국 이름 이정복)의 주식강의를 접했다. 돈을 은행에 두지 말고 자신을 위해 일하게 하라는 말이 뇌리에 박혔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고 생각되었다.

사무실도 직원도 필요 없이 장차 가격이 비싸질 만한 주식을 저가에 사뒀다가 비싸졌을 때 팔면 되는 간단한 돈벌이를 왜 여태 몰랐을까. 돈 버는 법을 익혀서 나도 여유를 찾고 아들에게도 알려주자.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물고기를 잡아주기보다 물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종잣돈은 있었다. 살던 아파트를 전세 주고 집세가 저렴한 동네의 작은 평수에 전세를 들어서 생긴 차액을 노후자금으로 가지고 있었다. 다만 두 사람의 장래가 달린 돈이라 아내를 설득해야 했다.


아내의 표정이 밝고 말이 살가운 날을 골라서 진지하게 결심을 밝혔다.

예상대로 씨가 안 먹혔다. 아내는 어떻게 둘의 생명줄인 노후자금을 넘보느냐며 도리어 나를 설득했다.

절대로 무리하지 않겠다고 몇 번을 말해도 지금까지 해온 대로 그냥 책이나 읽고 글이나 쓰라고 하였다. 혹여 남들이 들으면 치매 걸린 줄 알 거라며 더 이상 말을 못 하게 하였다.

그냥 포기하려다가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그냥 죽으면 너무 아쉬워서 눈을 못 감을 것 같소. 마지막에 후회 없이 떠나고 싶어서 정신 흐려지기 전에 꼭 한 번 해보려는 거요.


아내는 냉소와 우려가 절반씩 섞인 표정으로 내 눈을 빤히 쳐다봤다.

나는 욕심부리지 않고 분수를 지키겠다는 말로 아내를 안심시켰다.

고맙게도 아내는 투자금 5천만 원 한도를 조건으로 반대를 거뒀다.

나는 아내의 손을 꼭 잡고 반드시 성공을 거둬서 경제적 자유를 누리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아내는 성공을 기대하겠다며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내 이름 황금수레 아니오. 바퀴가 금빛이고 준마 네 마리가 앞에서 끄는 임금님 수레. 당신은 김 씨니까 금수레를 탈 자격을 이미 갖췄소.
금수레까지는 바라지 않을 테니 손수레나 편하게 태워주세요.


나는 곧바로 주식공부를 시작할 태세를 취했다.

컴퓨터를 켜고 교보문고 온라인서점에 접속해 존리의 저서들을 검색해 한꺼번에 네 권을 구입했다.


『왜 주식인가?: 부자가 되려면 자본이 일하게 하라』(2012)
『존리의 부자되기 습관』(2020년)
『엄마, 주식 사주세요』(2020년)
『존리의 금융문맹 탈출』(2020년) 얻었다.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고3 때처럼 A4 용지에 매직펜으로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라고 크게 써서 모니터 뒤편 벽에 붙였다.

유튜브를 열어서 존리의 주식강의 영상 네댓 편을 연달아 보았다.

이틀 뒤에 택배로 책이 배달되어 이틀 만에 네 권을 다 읽었다.


사흘 째 되던 날은 동네 구립도서관에 가서 주식책 세 권을 빌려왔다. 도서관에는 주식투자를 비롯한 재테크 관련 서적 외에 일간신문과 잡지들이 다양하게 갖춰져 있었다.

도서관에 없는 책은 구내(區內) 일곱 개 구립도서관이 연결된 ‘상호대출’ 서비스를 통해 편하게 빌려볼 수 있었다. 절판되었거나 구내 도서관에 없는 책은 국립중앙도서관의 공동도서관지원서비스(책바다, 책이음)를 통해 받아볼 수 있었다.

도서관의 냉난방시설이 완벽해 사계절 쾌적한 분위기에서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이용할 수 있었다. 구립도서관의 다양한 서비스와 시설들을 이용하면서 지방자치의 장점과 현재 수준을 제대로 체감하였다.

40년 넘게 연구실과 대학강단을 부지런히 오간 덕분에 의자에 앉아서 오래 책을 읽는 일이 고되지 않았다.

이따금씩 나이에서 비롯되는 체력의 한계가 느껴지면 『후한서(後漢書)』「마원전(馬援傳)」에 나오는 노당익장(老當益壯)을 떠올렸다.

늙으면 뜻과 기백을 더욱 굳게 지녀야 한다. 노익장(노당익장)에 주인이 따로 있나.

나날이 더해지는 독서량에 비례해 주식에 대한 지식이 쌓였다. 네덜란드의 튤립파동, 미국의 대공황, 블랙 먼데이, IMF 외환위기, 닷컴버블, 9.11 테러, 써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 코로나19 팬데믹 등으로 전 세계의 거의 모든 주식이 폭락한 역사를 알고, 그런 위기가 절호의 기회였던 사실도 알았다.

책만 읽은 것이 아니다. 텔레비전의 경제방송도 열심히 보고 경제신문도 부지런히 읽었다. 증권사들의 홈페이지에 있는 주식강의 영상도 시청하였다.

금리·환율·유가와 주가의 관계, ETF, 선물과 옵션, 공매도, 채권, 복리, 밸류체인, 밸류에이션, 유동성, 수급, 지수, 차트, 세력, 큰손 등의 개념과 세부 내용을 터득하는 재미에 하루가 두세 시간처럼 짧게 느껴졌다.



“할아버지 촛불처럼 생긴 저 그림들은 뭐야?”

어느 여름날 오후에 컴퓨터를 켜고 유튜브에 접속해 주식강의를 듣는데 초등학교 1학년인 손자가 다가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응, 촛불이 아니고 캔들이라고 하는 거야.”

“캔들? 미국말이야?”

“응. 미국말인데 우리나라 말로는 촛불이라는 뜻이야.”

“치. 그러면 내 말이 맞은 거잖아. 할아버지는 못 믿겠어.”

영상에 집중하느라 촛불과 캔들이 같은 말임을 깜빡하였다가 졸지에 실력 없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우리 현수 아주 잘했어요. 무엇이든지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지금처럼 바로 물어봐야지 똑똑하고 씩씩한 어린이가 되는 거예요. 알았지요?”

나는 현수의 허리를 가까이 끌어당겨 두 팔로 껴안고 넉넉히 칭찬해 주었다.

“할아버지. 그런데 저 촛불들은 왜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나눠져 있는 거야?”

나는 캔들의 색깔이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정해진 이유를 모른다. 누가 언제 무엇을 근거로 정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다.

현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대답을 기다렸다.

모른다고 하면 ‘그것도 모르느냐’고 또 핀잔을 들을까 봐 현수의 눈높이에 맞을 것 같은 우리나라 국기를 끌어다 붙였다.

“아마도 태극기 색깔에 맞춰서 그렇게 한 걸 거야. 태극기 가운데 동그라미를 보면 위는 빨간색이고 아래는 파란색이잖아.”

나는 설명을 하는 동안 현수의 표정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렇구나. 나는 청사초롱 색깔과 똑같이 한 건 줄 알았어.”

듣고 보니까 현수의 대답이 더 그럴듯해 보였다.

하지만 말을 바꿀 수가 없어서 화제를 슬쩍 옆으로 틀었다.

“현수는 청사초롱을 본 적이 있어?”

“옛날에 임금님이 살았던 집에 갔을 때 연못가에 매달려 있었잖아. 위는 빨간색이고 아래는 파란색이었던 거 생각 안 나? 어린이날 할아버지가 거기 데리고 갔잖아.”

혹을 떼려다가 도리어 혹을 키웠다.

계속하다간 점수만 더 잃을 것 같아 대화를 끝낼 핑계를 찾았다.

화장실을 가야겠다고 생각하였는데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

“현수야 치킨이다. 얼른 받아서 할머니랑 같이 맛있게 먹자.”

현수는 치킨을 맛있고 먹고 나서 텔레비전에서 만화영화를 할 거라며 거실로 나갔다.

황영감은 노트를 덮어서 책상 위에 두고 책들을 처분할 방안을 궁리했다.

평소 자주 이용하는 동네의 구립도서관에 모두 기증하는 방법을 떠올렸다가 잊어버렸다. 현직 시절 정년퇴직하는 교수가 자신의 책들을 우리 기관 도서관에 기증하겠다고 알려와 곤란을 겪은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황영감은 궁리를 멈추고 의자에서 일어나 책장 앞으로 다가갔다.

다섯 층으로 된 선반에 가지런히 꼽혀 있는 백 수십 권의 책이 각기 안에 담긴 내용을 압축해서 머릿속에 넣어줬다.


미국의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가 시중금리를 올릴 것인지 내릴 것인지, 올리면 얼마나 올리고 내리면 얼마나 내릴 것인지를 두고 국내외 전문가들이 경쟁적으로 전망과 예측을 쏟아내는 장면이 흘러간 가요의 가사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전·현직 대학교수, 미국 중앙은행(FED) 관계자, 뉴욕 월스트리트의 전설적 펀드매니저들의 견해가 극명하게 엇갈려서 극심한 혼란을 겪었던 생각도 났다. 금리 문제를 가지고 그토록 시끄럽게 요란을 떠는 이유를 고민하고 누구의 주장이 옳은 것인지를 밤새 따져본 기억도 났다.


[다음 호에 계속]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