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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황금수레 02화

여의도는 동물왕국

by 조병인

황영감은 주식공부를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서 주식시장은 주식투자는 성별·연령·체급을 나눠서 기량을 겨루는 운동경기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주식투자는 국적·성별·나이·학력·직업·재력·경험·특기·인원·전략·전력이 깜깜한 상대방을 재주껏 이겨야 하는 암흑 속 난투극이다.

주식시장은 남의 계좌 돈을 자기 계좌로 옮기기 위한 반칙과 속임수가 난무한다. 도처에 지뢰와 함정이 숨겨져 있고 사방에 독충과 독뱀이 우글거리는 밀림 같다. 약육강식의 원칙에 따라 잔인한 포식자들을 정점으로 하는 먹이사슬이 형성되어 있다.

그런데 수년 동안 주식책을 수백 권 읽고 수많은 주식강의를 들어도 강적들과 겨뤄서 이길 수 있는 대항력이 늘지 않는다. 주가가 오르면 놀부네 기와집을 상상하고 주가가 내리면 흥부네 오막살이를 상상하다 빈손으로 끝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주식시장 전체를 통틀어서 개미 투자자들의 우군은 한 명도 없다. 심지어 주식시장과 투자자들을 보호한다는 공무원들도 아군으로 위장한 적군이다. 정의로운 감시자를 자처하는 언론은 먹이사슬의 꼭대기다.

그런 줄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FOMO에 떠밀려 이차전지 광풍을 철석같이 믿었다가 헛물만 켜고 밀려났다. 시뻘건 불기둥이 솟구칠 때는 탐욕에 취해서 수익을 놓치고 시퍼런 칼날이 고공에서 내리꽂을 때는 공포에 질려서 손실을 피하지 못했다. 천만다행으로 쪽박은 면했지만 가누기 힘든 상실감과 허탈감이 산더미처럼 쌓았다.


황영감은 어렵사리 영혼을 추스르고 뼈저리게 깨달은 교훈을 보물지도에 적었다.


주식투자가 쉽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이다. 주식시장은 흙탕물처럼 혼탁하고 전쟁터처럼 살벌하다. 본능적 탐욕과 공포가 만들어내는 번뇌와 갈등이 쉴 새 없이 생성된다. 눈앞의 문제를 미처 풀기도 전에 새로운 문제가 닥치고, 그 난관을 넘으면 다시 또 새로운 장애물이 닥친다.


그 기록을 남긴 뒤로 ‘투자’라는 단어가 ‘도박’의 성형물로 보였다. 겉보기에 점잖고 고상해 보이는 ‘재테크’도 한통속 같았다.

결국 포기를 결심했다가 ‘본전심리’에 덜미를 잡혔다. 포기는 곧 굴복이라는 비뚤어진 사고가 사그라진 자존감을 꼬드겼다.

투자한 시간과 돈에 대한 미련과 패배를 인정하기 싫은 오기가 작당하여 심기일전을 압박했다.

황영감은 등 뒤로 사람이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집에 다른 사람이 없어서 아내이겠거니 하고 돌아보지 않았다.


“아까부터 무슨 책을 그렇게 오랫동안 찾으세요? 잘 뒀는데 안 보이는 책이 있어요?”

김 씨 부인은 주방을 드나들면서 열린 방문으로 본의 아니게 영감의 거동을 살핀 것 같았다.

“없어진 책을 찾는 게 아니고 있는 책들을 누구에게 줘야 좋을지를 궁리하고 있는 거요.”

황영감은 본의 아니게 핀잔을 줬다고 생각하고 곁눈으로 아내의 표정을 살폈다.

김 씨 부인은 맞불 대신 궁금증을 들이밀었다.

“이번에는 어떤 책들을 누구한테 주시려고요. 다 돈 주고 산 것들인데.”

“여기 이 주식책들 다요. 다시 안 볼 폐지들을 장차 어디다 쓰겠소. 이사 가기 전에 없애야겠는데 줄 사람이 마땅치 않소.”

“주민센터에 작은 도서관이 있던데, 거기다 기증하면 좋아하지 않을까요?”

“교양서적이 아니라서 받아주지 않을 거요. 혹시라도 이런 책을 읽고 주식투자에 나섰다가 패가망신하는 사람이라도 생기면 누가 책임지겠소.”

“듣고 보니 내가 센터 책임자라도 이런 책들은 받기가 곤란하겠네요.”


김 씨 부인의 시선이 책상 위의 낡은 노트를 훑었다.

황영감은 전에 자랑삼아 아내에게 노트를 보여준 적이 있었다.

“어쩐 일로 보물지도를 다시 꺼내셨어요.”

“당신 금수레 태워주겠다고 신나게 공부하던 때가 생각나서 잠깐 들춰봤소. 책장구석에 꼽혀 있기에 꺼내서 읽어보다가 먼지만 목이 아프도록 마셨소.”

황영감은 자신도 모르게 붉어지려는 낯빛을 억지로 숨겼다. 슬그머니 노트의 표지를 덮어서 책장으로 다가가 본래 있던 자리에 밀어 넣었다.

“제가 방해를 했나 보네요. 그만 나가 볼게요.”

영감의 심기가 복잡하다고 느낀 김 씨 부인은 연속극 재방송을 보겠다며 거실로 나갔다.

“방해는 무슨.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

황영감은 오른손을 살짝 쳐들고 아내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영감은 대박을 터뜨려줄 유망주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던 기억을 떠올렸다.

수년 동안 아무리 많은 책을 읽고 아무리 많은 강의를 들어봐도 그런 길은 없었다.

‘좋은 주식을 고르는 기준’이라고 해서 내용을 읽어보면 ‘좋은 주식을 골라야 하는 이유’가 나열되어 있었다.


‘주가보다 기업의 가치를 파악하라’, ‘경영진의 자질과 역량을 점검하라’, ‘사업의 진입장벽을 살펴라’, ‘유행과 인기에 주목하라’, ‘기술의 변화를 면밀히 살펴라’ 같은 조언은 술을 마시고 귀가하다 골목에 오줌을 누는 취객의 헛소리로 들렸다.


그 회사에 다닌 적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기업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겠는가. 설령 다닌 적이 있어도 경영진이 아니었으면 경영진의 흠결을 어떻게 샅샅이 알겠는가. 더구나 요즘처럼 개인정보와 사생활 보호가 엄격한 세상에 영장도 없이 어떤 신통력으로 경영진의 도덕성과 역량을 확인하라는 말인가.

황영감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의자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커피포트에 물이 채워져 있어 그대로 전원을 켰다.

물이 끓을 동안 창문 밖으로 보이는 강 건너 아차산의 가을 경치를 감상하였다.

때때로 가족과 함께 워커힐호텔 같은 곳에서 안락한 휴식을 즐기는 삶을 꿈꾸던 시절이 생각났다.


“커피 드실 거면 저도 한 잔 내려주세요.”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아내가 물 끓는 소리를 듣고 말했다.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사모님.”

황영감은 원두커피 두 잔을 내려서 오래된 쟁반에 얹어가지고 거실의 소파로 갔다.

“커피 향이 후각을 유혹하네요. 바리스타로 취업하셔도 되겠어요.”

“의자에 앉아서 30분 넘게 머리를 쥐어짜 봐도 묘안이 안 떠오르네.”

“중고로 팔지 그래요. 저번에 이사할 때도 알라딘에 많이 파셨잖아요.”

“많이 팔기는 뭘 많이 팔아요. 힘들게 싣고 갔다가 다시 가져온 책이 훨씬 더 많았는데. 책값이라고 받은 돈도 둘이 점심 사 먹을 금액이 안 되었고.”

“맞다. 안에 메모나 밑줄 같은 게 있으면 다 퇴짜 맞았다 그랬지요.”

“인터넷을 검색해 봐야겠소. 틀림없이 전문업체가 있을 거요. 우리처럼 이사하면서 헌책들을 처분하는 집이 어디 한둘이겠소.”

“맞아요. 몇 번 입고 안 입는 옷들도 그런 업체들이 사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김 씨 부인은 입에 대고 있던 커피 잔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맞장구를 쳤다.

황영감은 커피 잔을 들고 소파에서 일어나 자기 방으로 다시 가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전원을 넣고 네이버 검색창에 ‘헌책방문수거’라고 입력했다.

헌책, 중고책 팔기, 헌책수거, 중고책 매입 같은 광고문구가 세로로 늘어서서 고객의 선택을 기다렸다.

「헌책 방문수거 서비스」라는 업체에 마우스를 가져다 대고 왼쪽 마우스를 클릭하였다.

짤막한 안내문무가 떴다.

이민이나 이사 시 처분하기 곤란하신 책들을 매입합니다. 많은 책들을 무겁게 들고 오실 필요 없이, 책들의 사진을 찍어서 아래 번호로 보내주시면 대략적인 견적을 보내드립니다. 연락처 : 010-XXXX-XXXX

안내문대로 사진을 찍어서 문자와 함께 전송했다.

이사를 가야 해서 헌책들을 처분하려고 합니다. 얼마나 받을 수 있고 운반은 누가 어떻게 하는 건지요. 집은 서울 강동구입니다.

5분도 안 되어서 전화가 왔다.

“모두 해서 5만 원 드릴 수 있겠습니다. 운반은 저희가 가서 차로 실어옵니다.”

“백 권이 넘는데 그것밖에 안 돼요?”

“책의 제목들을 보니까 값이 나가는 책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요즘 종이책을 읽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깊이 생각해 보고 결심이 서면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황영감은「헌책 출장매입. 전국 어디든 OK」라는 카피를 마우스로 클릭하였다.

첫 번째로 본 것과 비슷한 안내문구가 떴다.

중고책 방문요청을 문의하시려면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을 전체적으로 제목이 보이게 사진을 촬영해 아래 번호로 보내주십시오. 책들이 꺼내져 있으면 제목이 보이게 가지런히 쌓아놓고 사진을 찍어서 보내주시면 됩니다. 연락처 : 010-XXXX-XXXX

‘전달’ 메뉴를 눌러서 앞서 보낸 사진과 문자를 그대로 보냈다.

3분도 안 되어서 휴대폰 벨이 울렸다.

“3만 원 드릴 수 있겠습니다. 책은 책장에 그대로 두시면 됩니다.”

슬쩍 반응을 떠보는 답신을 보냈다.

책값이 너무 싼 거 같습니다.

곧바로 두 번째 전화가 왔다.

“운반비 빼고 나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추석 밑이라 일손이 달려서 더 드리고는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시군요.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결심이 서면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십시오. 추석명절 즐겁게 보내세요.”

“네. 감사합니다.”


황영감은 책들을 팔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백 권이 훨씬 넘는 책을 5만 원에 파느니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편이 백 번 낫지.

황영감은 전에 회원으로 가입한 주식카페에 공지를 올려서 책을 원하는 사람들을 모으는 방안을 떠올렸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희망자가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고 책을 나눠줄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


“무슨 전화인데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결심을 해요?”

거실에서 뜨개질을 하고 있던 아내가 방으로 들어와 가볍게 물었다.

“헌책 사가는 업자들에게 사진을 찍어서 보냈더니 폐지 취급을 합디다.”

“다해서 얼마나 주겠대요?”

“처음 전화한 곳은 5만 원, 두 번째로 전화한 곳은 2만 원 준답디다.”

황영감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대답하였다.

“너무 헐값이네요. 황금수레님의 야무진 꿈과 포부를 길러준 책들인데”

김 씨 부인은 농담 같기도 하고 진담 같기도 한 말을 중얼거렸다.

“하기는 당신 손수레도 제대로 못 태워줬으니 5만 원도 많다고 봐야겠지요.”

황영감 역시 아내의 아쉬움에 대한 대꾸를 혼잣말처럼 웅얼거렸다.

“당신 무슨 투자교육받는다고 그 더운 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서대문까지 다니던 기억이 나네요. 학생 때 못 타본 개근상 타야 한다고 한 번도 안 빠지고 열심히 다니던 생각나세요?”

김 씨 부인이 영감을 위로해 줄 생각으로 영감이 주식공부에 매진했던 시절을 슬쩍 들췄다.

“당신도 나 교육시간 늦을까 봐 이른 점심 먹여 보내느라 수고 많았는데···.”

황영감은 민망하고 겸연쩍은 어조로 아내의 헌신적 내조를 치켜세웠다.

“저야 어차피 차릴 상을 조금 일찍 차렸을 뿐이지만 멀리까지 공부하러 다닌 당신은 노익장을 보여주신 거지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슬그머니 일어나 자기 방으로 갔다.

황금수레를 타보려다 못 탄 과거를 아내가 들추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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