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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황금수레 10화

한 가지 목표 달성

by 조병인

황영감은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마우스를 굴려서 타자를 마친 문장들을 천천히 읽어보았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알을 손에 쥔 느낌이다.
정성껏 부화시켜 때맞춰 든든히 먹여서 건강하게 잘 키우면 금수레도 안겨줄 수 있을 것 같다.


형광펜이 칠해진 부분들만 읽은 것이 처음이 아닌데 오늘처럼 당장 해야 할 일들이 가지런히 정돈된 기분을 느끼기는 처음이다.

책상 위에 놓아둔 휴대폰을 집어서 카톡을 열었다. 방금 타이핑한 파일을 아들에게 보내주기 위해서다.


아들이 11시에 보낸 문자가 속히 읽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착보고일 것으로 짐작하고 오른손 검지로 화면을 건드렸다.

도착보고 치고는 문장이 생각보다 길다.


아버지께서 모아두신 주식책들을 이사하시기 전에 저희 집으로 가져오겠습니다. 집사람에게 이야기했더니 자기도 주식을 해보고 싶대서 둘이 같이 하기로 했습니다. 최근 정부가 ‘코스피 5000’을 약속하고 국회가 자본시장 선진화를 위한 상법개정과 외환시장 개방 등을 추진하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 생각됩니다. 지지부진한 미국과의 통상무역협상과 미중 패권전쟁도 조만간 원만하게 매듭이 지어지리라 봅니다.

황금수레님의 열정과 끈기에 아낌없는 박수와 성원을 보냅니다.

편안한 밤 맞으셔요. 아들 건우 드림.

저 혼자가 아니고 며느리까지 끌어들이겠다고?
상법개정, 한미통상무역협상, 미중패권전쟁 같은 것을 지켜보고 있다고?

황영감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나 두 손으로 창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봤다.

칠흑같이 어두운 올림픽도로에서 나는 요란한 자동차 소음이 별빛을 덮었다.

반딧불 같은 자동차 불빛들이 요란한 엔진소리에 떠밀려 급하게 내달렸다.

서울특별시와 경기도를 연결하는 구리·암사대교의 황홀한 야경이 서늘한 밤빛으로 물감을 녹여 가을을 색칠하는 것 같았다.


사는 동안 일흔 번 그랬을 것을 생각하니 인생무상이 떠올랐다.

덧없는 삶이라 생각하니 다섯 달 전에 꼼짝없이 생을 마칠 뻔한 기억이 포개졌다.


지난 봄 어느 날 하늘이 맑기에 근처 한강공원으로 혼자 산책을 나갔었다. 강변을 따라 삼십 분쯤 걷다가 집 쪽으로 되돌아오는데 바로 눈앞에서 내 허리보다 굵은 아름드리 미루나무가 갑자기 길 위로 쓰러졌다. 보행로 아래쪽에 5백 미터쯤 일렬로 서있는 수십 그루 가운데 하나가 하필 내가 지나갈 때 느닷없이 내 코앞을 덮친 것이다.

놀라서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미루나무가 뽑힌 자지를 가봤다. 크 큰 나무의 뿌리가 통째로 삭아있었다.

멀쩡하게 서있는 나머지 나무들이 위험천만한 흉기로 보였다.

한강공원사무소에 전화를 걸어서 미루나무들을 전부 베라고 민원을 넣으려다 현장사진만 증거로 찍어두고 집으로 왔다.

3,4만초 늦게 쓰러졌으면 그길로 죽었을 것을 생각하니 천지신명이 사생결단을 반드시 실천하라고 계시를 내린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황영감은 주식투자로 경제적 자유를 얻기로 결심한 초심을 한 번 더 야무지게 다졌다.

가장 먼저 JB의 저서들에 소개된 지수변동에 기초한 ‘반토막 전략’을 필살기로 택했다. 그 전략이 특별히 기발해서가 아니고 이미 유명한 ‘역발상 투자’의 방법론이 만만해보였기 때문이다.


황영감은 자타가 슈퍼개미로 일컫는 이들 중에 발상전환을 권하는 이는 많이 봤어도 방법론을 자세히 알려주는 이는 본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공포에 사고 탐욕에 팔아라.’, ‘남들이 팔면 사고 남들이 사면 팔아라.’, ‘주가가 폭락할 때 매수하면 큰 수익이 따른다.’ 수준의 권고가 전부다. 오직 JB 한 사람만 현금을 준비해두었다가 코스피 지수가 50퍼센트 허락하면 자기 말을 믿고 과감하게 뛰어들라고 자신 있게 권했다.


황영감은 JB가 알려준 ‘반토막 전략’을 역발상투자와 가치투자의 결정판이면서 끝판 왕이라고 여겼다.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지수가 반토막 났을 때 주식을 사는 것은 주가가 기업의 실제가치보다 저평가된 주식을 사는 가치투자에 해당한다.


둘째. 지수가 반토막 났을 때 주식을 사는 것은 손실이 커지면 보유한 주식을 헐값에 파는 투자자들의 심리를 역이용하는 역발상투자 해당한다.

셋째. 반토막 전략, 가치투자, 역발상투자 공히 주가가 내리기를 기다릴 때나 주가가 오르기를 기다릴 때나 ‘초인적 뚝심과 인내’가 필요하다.

황영감의 결론은 객관적 증거 없이 주관적 판단만으로 내린 것이 아니다.

황영감은 증권계의 고전으로 통하는『켄 피셔 역발상 주식투자』, 『데이비드 드레먼의 역발상 투자』, 『존 템플턴의 가치투자전략』, 『이채원의 가치투자』같은 명저와 JB가 저술한『돈 공부는 처음이라』와 『돈의 시나리오』의 내용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다.


황영감은 또 JB의 투자전략들이 유럽의 전설적 투자자로 통하는 앙드레 코스톨라니의 달걀이론에 딱 들어맞는다고 믿었다. 경기 사이클에 맞춰서 투자대상을 수시로 바꾸는 대응방법이 달걀이론과 똑같기 때문이다.


황영감은 책장에 꼽혀 있는 주식책들을 아들에게 넘기지 않기로 하였다.

‘돈이 되지 않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JB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지만 그런 시간을 일부러 늘릴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황영감은 조용히 창문을 닫고 의자에 앉았다.

컴퓨터 모니터로 아들에게 보낼 답신을 적었다.


네가 보낸 문자 읽고 그동안 내가 너희들에게 너무 무심했던 것을 깊이 반성했다. 너희 부부도 국회의 상법개정과 정부의 한미통상무역협상 같은 문제에 관심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미처 못 했다. 진즉 알아채고 때때로 만나서 정보도 공유하고 토론도 벌이지 못한 것이 많이 아쉽지만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라 생각한다. 젊어서 재테크를 공부하고 실전까지 경험하는 것은 미래를 가꾸는 거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와 너희 부부가 긴밀히 소통하면서 같이 ‘돈의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경험을 공유한다면 혼자서 하는 것보다 훨씬 성과가 좋지 않겠느냐. 그런데 내가 직접 경험했고 JB도 책에 적었듯이 다양한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니 틈나는 대로 JB의 저서들을 반복해서 읽도록 하여라. 그 안에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알을 찾아내 정성껏 부화시켜 든든히 먹이면서 건강하게 잘 키우면 반드시 ‘경제적 자유’를 얻을 것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차차 나누기로 하자.


너희 부부는 내가 있는 동안의 희망이고 사랑스러운 너희 자식들은 내가 없을 미래의 희망이다. 2025년 10월 10일 밤 12시. 아직은 손수레.


황영감은 마우스로 컴퓨터 바탕화면의 카톡 아이콘을 열었다. 모니터 화면의 글을 Control+C로 복사해서 카톡의 글쓰기 창에 Control+V로 붙이고 중앙에 오른쪽으로 화살촉이 그려진 노란색 동그라미를 눌렀다.

5년 전에 처음 주식을 시작하면서 생각한 두 가지 목표 가운데 한 가지를 이뤘다. 나머지 한 가지도 머지않아 반드시 이뤄질 것이다. 건우도 며느리도 또래들보다 똑똑하고 야무지니까.


황영감은 속으로 승리의 희열을 느끼면서 컴퓨터 전원을 끄고 의자에서 일어나 침실로 갔다.


“지금 몇 신데 이제 오세요. 금방 해 뜨겠어요. 어서 주무세요.”

선잠이 들었다가 영감의 기척에 잠이 깬 김씨 부인은 애정 섞인 투정으로 남편을 맞았다.

“단잠을 깨워서 미안하오.”

침대에 몸을 눕힌 황영감은 시간이 꽤 지나도록 잠에 들지 못하고 좌우를 번갈아가며 몸을 뒤척였다.

“잠이 안 오세요? 왜 자꾸 그물에 걸린 숭어처럼 퍼덕거려요.”

“안면을 방해해서 미안하오. 이제부터 잘 테니 말 걸지 마시오.”

“알았어요. 뒤척이지나 마세요.”

황영감은 일 년쯤 전에 만 일흔 번째 생일에 느낀 마음과 생각을 간추려둔 창작시 다섯 편 가운데 첫 번째 작품인 ‘노당익장(老當益壯)’을 아내 귀에 안 들리게 숨소리까지 죽이고 암송하였다.


시간이라는 그 친구

앞에 있을 때는 아득하더니 지나고 돌아보니 순간이다.


건강이라는 그 녀석

싱싱할 때는 돌멩이 같더니 시드니까 금덩인 줄 알겠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작별채비를 해야 할 즈음에

무병장수를 꿈꾸는 노욕은 어디서 생기는지 모르겠네 .


이목구비는 날로 무뎌지는데 마음은 동심에 붙잡혀 있으니

이러다간 몸이 마음을 떼놓고 혼자만 훌쩍 가버릴 것 같다.

일흔의 팔을 잡고 잠시 쉬었다 가자니까 여든이 기다려 안 된단다

여든의 앞을 막고 조금 천천히 오랬더니 아흔이 보채서 곤란하단다


너희가 그렇게 박절하게 굴면 나도 구차하게 매달리지 않겠다

천지신명이 육신을 받쳐주고

산천초목이 생명을 지켜주고

청풍명월이 마음을 보듬는데

시계가 숨이 가쁘면 어떻고 달력이 땀을 흘리면 어떠랴.

당장 내일 뒷덜미를 잡히더라도 영생할 것처럼 열심히 배우고

팔과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여 두뇌와 어깨에 근육을 불려놓자.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요단강 건너는 다리에서 까다로운 면접시험 봐야 되고

체력검사도 받아야 할는지


황영감은 아들 내외에게 다만 얼마라도 종자돈을 주고 싶었다.

그래야지 신명이 나서 실행을 앞당길 것 같았다.

‘금액이 적더라도 직접 번 돈으로 하라.’는 JB의 권유가 어둠 속에서 훼방을 놓았다.

오늘은 푹 자자. 날이 밝으면 집사람과 상의해보기로 하고 오늘은 낮은 베개 높이 베고 돼지꿈이나 길게 꾸어보자.


황영감은 몸을 반듯이 눕히고 죽은 시체처럼 양손을 길게 뻗었다.

그 자세에서 다섯 번 연속해서 콧김을 힘차게 내뿜었다. 황영감이 수면장애를 느낄 때마다 효과를 검증한 셀프 마취 비법이다.


[끝-마지막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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