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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황금수레 08화

생산적인 소통

by 조병인

“먹던 밥이나 다 먹고 얘기하자. 따로 할 말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일단 밥부터 먹자.”

“사실은 제가 아버지께 감정을 부탁드리려고 주식책을 한 권 사 왔어요.”

아들은 숟가락을 멈추고 아버지의 입을 주시하며 반응을 기다렸다.

“금수레를 쫓다가 넘어져 다친 내가 어찌 주식책을 감정하겠느냐.”

황영감은 아들의 생각이 짧았다는 어조로 거북한 심리를 드러냈다.


“내공이 깊으시잖아요. 지난번 코로나19 팬데믹 때 주식으로 재미를 본 입사동기가 저를 만날 때마다 귀찮을 정도로 권해서 한 번 읽어보려고 샀어요.”

황영감도 김 씨 부인도 밥그릇에 코를 박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책을 사 왔는지 한 번 보기나 하자"

식사를 다 마치고 나서 황영감이 잠시 어색했던 분위기를 풀었다.

"책 보여드릴게요."

아들은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소파로 갔다.

가방에서 『돈의 시나리오』라는 책을 꺼내서 식탁으로 가져와 아버지에게 건넸다.


“네게 이 책을 권한 걸 보면 주식을 제대로 배운 친구 같구나.”

“입사동기 육십 명 중에서 제일 똑똑하고 부지런한 친구예요.”

황영감은 그 책을 이미 사서 여러 번 읽고 책장에 가지고 있었다.

“그 책을 읽어보면 그 친구의 깊은 뜻을 이해하게 될 거다.”

황영감은 속으로 아들이 그 책을 꼭 읽어보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주식을 직접 해볼 생각은 없어요. 도박 같아서요. 여윳돈도 없고요.”

“주식투자가 도박이면 주식하는 나는 노름꾼이란 말이냐?”

황영감은 안색을 바꾸고 아들에게 따지듯 물었다.


“그런 뜻이 아니라 주식으로 돈을 벌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만큼 어렵다고 해서 그냥 해본 소리예요.”

아들은 무심코 내뱉은 말을 주워 담기에 바빴다.

“주식이 도박인 줄 알면서 주식책을 감정해 달라는 것은 아편이 마약인 줄 알면서 양귀비를 감정해 달라는 것과 같은 말이 아니냐?”

황영감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아들을 더 강하게 압박했다.


“주식을 아편에 비유하시니 드릴 말씀이 없네요.”

아들은 길을 가다가 모르는 행인에게 느닷없이 폭행을 당한 사람처럼 ‘도대체 왜 그러시냐.’는 표정이었다.


“아니 건우가 뭘 잘못했다고 그렇게 난리세요. 부모에게 가르침을 받겠다고 찾아온 자식을 칭찬은 못해줄 망정 무슨 중죄인 다루듯 다그치면 애가 얼마나 민망하겠어요?”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면서 부자간의 대화를 듣고 있던 김 씨 부인이 앞치마를 식탁 위에 풀어놓고 거실로 나와 영감을 공격했다.


“아버지가 언제 저를 중죄인 다루듯 하셨어요. 저의 잘못을 교정해 주신 거지요.”

황영감은 아비에게 꾸중을 듣던 자식이 어미가 우군이 되어주니 아비를 두둔하는 것이 신기해 보였다. 그때까지 억지로 참고 있던 웃음이 마침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하하하! 실은 나도 주식투자는 도박이 아니라고 생각지 않는다. 요행수를 바라고 돈을 거는 카지노 게임과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에 돈 버는 일 치고 운이 없어도 되는 것이 있더냐? 많이 배운 사람들이 비즈니스라고 부르는 것들 중에 불운해도 성공할 수 있는 것이 하나라도 있더냐?

황영감은 아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눈빛으로 대답을 재촉했다.

그런 사업은 없지요. 사업에 실패하면 운이 나빴다고 하잖아요. 새해가 되면 무속인을 찾아가서 운세를 점치는 사업가가 많다고 들었어요. 좀 더 확대해서 말하면 인생 자체가 도박이지요.

아들은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들을 주저리주저리 읊었다.


네 말대로 불운해도 성공할 수 있는 사업은 없다면 유독 주식투자만 도박으로 몰아세울 이유가 없지 않으냐. 주식투자는 도박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주식투자만 쏙 빼서 불량하게 취급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이다. 내 말에 공감을 느끼느냐?
아버지 말씀 듣고 보니까 주식투자만 도박으로 여길 일이 아니네요.


황영감은 아들에게 주식공부를 권하면 받아들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건우야. 내가 너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는데 시간이 되겠느냐.”

황영감은 아들이 다음에 듣겠다고 나올 경우를 대비하지 않고 불쑥 말을 꺼냈다.

“이제 그만 보내야지요. 벌서 여덟 시인데. 현수 어미랑 애들 기다려요.”

“여기 온다고 전화했어요. 9시쯤 일어날게요.”

아비의 뜻을 흔쾌히 따르는 아들이 다른 때보다 더 듬직해 보였다.

“그래. 그러면 한 시간 내로 이야기를 마치도록 하마.”

“제가 이해하기 쉽게 말씀해 주세요.”

아들은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고 아버지의 입을 주시하였다.

“얘기 나누실 동안 저는 과일 좀 깎아올게요.”

앞치마를 들고 거실에 서 있던 김 씨 부인은 몸을 돌려 주방으로 들어갔다.


“잠깐만 기다려라. 실물을 보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네 기다릴게요.”

황영감은 앉아있던 소파에서 일어나 자기 방으로 갔다.

잠시 뒤에 두께가 도톰한 책 다섯 권을 두 팔로 끌어안고 나와 소파의 팔걸이 위에 올려놓았다.

“하실 말씀이 많으신가 보네요.”

아들은 아버지가 꺼내온 책들을 보며 걱정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길게 강의를 하려는 게 아니다. 책들만 보여주고 끝낼 것이니 염려 마라.”

아들은 구부리고 있던 어깨를 세우고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 책들은 모두 네가 가져온 책을 쓴 저자가 펴낸 것들이다.”

“저자는 어떤 인물이에요?”

“김종봉이라는 전업투자자인데 경제적 자유를 꿈꾸는 이들의 우상이다. 자기 이름보다 JB라는 필명을 자주 쓰더구나.”

황영감은 『돈 공부는 처음이라』라는 책을 손으로 집어서 아들에게 건넸다.

“JB가 자신이 찾아낸 비법과 검증결과를 세상에 공개한 저서다.”

황영감은 아들의 얼굴을 주시하며 표정의 변화를 살폈다.


“0원부터 시작하는 난생처음 부자 수업? 본제목보다 부제가 더 눈길을 끄네요.”

아들은 ‘0원’이라는 금액과 ‘부자 수업’이라는 단어에 눈길이 끌린 것 같았다.


황영감은 아들의 눈에 호기심이 더해지는 걸 느끼며 두 번째 책을 집어주었다.

검은색 하트 커버 중앙에 은색으로『돈의 시나리오 』라고 적혀 있었다.

“네가 산 것과 똑같은 책이다. 첫 번째 책에 담지 못한 경험과 생각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나는 이 책을 보물지도 급으로 귀하게 여긴다.”

“보물이 숨겨진 곳을 알려주는 책이라는 말씀이군요.”

황영감은 대답을 생략하고 세 번째 책을 집어서 아들에게 건넸다.


“JB가 첫 번째로 낸 책의 개정증보판이다. 처음으로 낸 책이 10만 부 이상 팔린 기념으로 낸 것인데 초판에 Q&A 몇 개 추가한 것 말고는 새로운 내용이 없더구나.”

아들은 대답 대신 오른손을 뻗쳐서 네 번째 책을 집어 들었다.

표지 오른쪽 상단에 금박글씨로 『돈은, 너로부터다』라고 쓰여 있었다.

“저자의 네 번째 책인데 주식책이 아니고 소설이다. 너 같은 직장인이 읽으면 한 번쯤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 만한 책이다.”

“주식하는 사람이 소설을 썼어요?”

아들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아버지에게 보충설명을 청했다.

“책의 공동저자가 베스트셀러 작가다. JB의 후배라는데 두 사람의 관계가 수어지교(水魚之交)처럼 보인다. 물과 물고기처럼 친밀해서 한 몸처럼 붙어 있는 거 같다는 말이다. 임금과 신하, 남편과 아내처럼.”

“서로 간에 신뢰가 엄청 깊은 모양이네요.”

아들은 눈꺼풀을 깜빡이며 마지막 책 소개를 기다렸다.


“이 건 열흘 전에 나온 신간인데 사흘 전에 사서 읽어봤다.”

황영감은 오른손으로『평범하지만 부자가 되고 싶어』라는 책을 집어서 아들에게 건넸다.

“책의 제목이 마치 제 마음을 훔쳐다 붙인 것 같네요.”

“이 책과 너의 운명적 만남 같구나. 앞에 보여준 책들이 ‘돈의 본질’과 ‘투자법’에 집중했다면, 이 책은 삶의 구조를 재설계해 부자의 길에 진입하는 데 필요한 전략을 자세히 다뤘다. 나는 이 책을 금고열쇠로 여긴다. 보물지도로 찾아낼 내 황금창고를 열어줄 확실한 열쇠.”

황영감의 두 눈과 아들의 두 눈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황영감은 아들의 눈에서 주식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자라는 걸 보았다.


“JB는 다재다능한 사람 같네요.”

“이익인간을 자처할 정도로 기계처럼 돈을 번다. 경기의 사이클을 타면서 주식·채권·부동산·채권·코인에도 투자하고 경제교육센터까지 운영하면서 계속 베스트셀러를 내고. 온라인 카페도 운영하는데 회원이 5만 명도 넘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황영감의 말이 늘어났다.

한 시간 내에 말을 끝내기로 한 약속은 진즉 잊은 것 같았다.

“흔히들 말하는 재테크의 달인인가 보네요.”

아들은 외계인 이야기 같다는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나는 이 책들을 모두 읽고 나서 JB를 투자의 천재라고 생각했다.”


“책들의 내용과 저자들에 대해 모르시는 게 없는 걸 보니 여러 번씩 읽으셨나 봐요.”

“그렇기도 하지만 삼백 권이 넘는 주식책을 읽어보고 으뜸으로 낙점한 저자들이다.”

아들은 수업시간에 선생님 말씀을 귀담아듣는 학생처럼 두 눈을 반짝거렸다.

“아버지께서 최고로 꼽으실 정도면 인세수입도 엄청나겠네요.”

“내 책장에 항상 꽂혀 있으니 관심 있거든 시간 날 때 가져다 읽어 보거라.”

아들은 흔쾌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적당히 끝내시고 그만 보내세요. 약속하신 시간이 한참 지났어요.

진즉 과일을 가져다 놓고 부자의 대화가 끝내기를 기다리던 김 씨 부인이 남편의 말길을 끊었다.

황영감은 고개를 쳐들어 반대편 벽에 걸린 디지털시계를 읽었다.

“어이구 어느새 9시 30분이 되었구나. 오늘 네게 하고 싶었던 말은 다 했으니 그만 가 보거라.”

황영감은 오른손을 들어서 손가락으로 현관 쪽을 가리켰다.

“더 늦기 전에 어서 일어서거라. 현수 에미 기다릴라.”

김 씨 부인이 며느리를 끌어들여 아들을 압박했다.


“네. 그럼 이만 일어설게요. 이 책은 이번 주말에 읽어볼게요.”

아들은 『돈의 시나리오』를 가방에 집어넣으며 아버지의 기대를 높였다.

“밤길 운전 조심하거라.”

“네. 안녕히 계세요. 조만간 식구들 데리고 다시 올게요.”

황영감은 현관에 서서 아들을 배웅하고 다시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김 씨 부인은 아들과 함께 복도로 나갔다. 현관문을 닫으면서 주차장까지 따라가서 출발하는 걸 보겠다고 하였다.


황영감은 아랫배에 무엇이 잔뜩 차있는 것을 깨달았다.

소파에서 일어나 급하게 화장실로 가서 바지의 지퍼를 내리고 시원하게 방광을 비웠다.

굵은 소변줄기가 변기 안의 수면을 부수는 소리를 들으며 벽에 걸린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처음에는 분명히 자신의 모습이었던 거울 속의 얼굴이 점차 방금 전에 다녀간 아들의 얼굴로 바뀌었다. 황영감은 배뇨가 끝난 것도, 시간이 흐르는 것도 잊고 거울의 마법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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