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중한 아롱이에 대한 긴 추도사
아롱이를 만질 수 없게 된 지 한 달이 조금 넘게 지났다.
어떻게 살아갈까 처음엔 막막했지만 지금 나는 그냥저냥 산다. 음식도 여전히 맛있고, 농담은 재미있고, 삶은 그 전과 마치 비슷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새벽에 달리다가 낯익은 길 위에 같이 걷던 나의 강아지와 그 강아지가 용변을 마치기를 지루하게 기다리던 과거의 내가 겹쳐 보이는 것은 예전에 없었던 일이며 앞으로 계속될 일이다.
개를 잃은 견주들은 모두 환청과 환각을 경험했다고 한다. 나는 그렇게까지 많이 느끼진 않았다. 내 귀가 익숙한 '타닥타닥' 발자국 소리를 그리워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걸 듣기까진 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녀석이 가기 전에 계속 아파서 발자국 소리도 줄고 현관 마중도 없어졌던 것이 참 고맙다. 어느 날 갑자기 그게 중단되었다면 내가 느낄 충격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다만 침대에 올라가면서 나는 계속 나도 모르게 누울 자리를 손바닥으로 쓸어본다.
침대의 진짜 주인들보다 먼저 침대에 눕기를 좋아했던 녀석, 그것도 한가운데에 가까운 위치에 자리잡기를 즐겼던 놈은 만약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침대에 뛰어들면 깔리기 딱 좋았다. 3킬로그램짜리 작은 개가 몇십 킬로그램의 인간에게 압사하는 사고를 피하기 위해 나와 남편은 눕기 전 개의 위치를 파악했다. 사실 다른 이유가 더 컸다. 이 성질 더러운 공주님은 자신이 이미 휴식을 위해 누운 상태에서 인간이 자신의 이부자리를 감히 건드리는 것을 질색했기 때문에 방심했다가는 으르렁을 넘어 입질을 당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공주님은 느긋하게 방심하고 있었을 때 인간이 이불을 건드리면 더 격하게 화를 내셨기 때문에 항상 눕기 전 손바닥으로 그분이 걸리지 않는지 확인한 다음에는 그분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 그분이 커뮤니케이션에 응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아롱아, 엄마야." (날 물지 마 이것아) 그 다음에야 그분을 조심스럽게 안아 올려 미천한 인간들도 누울 수 있도록 위치 조정을 했다.
뜨거운 여름의 막바지에 떠난 아롱이가 없는 채로 아름답고 시원한 가을을 맞이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개를 가진 사람과 개가 없는 사람으로 분류된다면 이제 나는 개가 없는 사람이다. 견주 중에서는 개가 사망한 후에도 동물등록에서 사망신고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지만 나는 아롱이의 장례식 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사망신고도 마쳤다. 긴 등록번호를 가지고 있었던 나의 강아지는 공식적으로 사망한 반려견이다.
젊은 나이부터 아팠고, 어쩌면 이 정도의 수명을 각오하고 있었다. 최선을 다해 치료에 임했고 많이 사랑했다. 떠나던 날 출근해버려서 놓친 5시간 남짓을 제외하고는 크게 죄책감은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금 나의 감정은 분노에 가깝다. 왜, 이렇게 보고 싶은데 내 옆에 없는 건지. 그 보드라운 털을 왜 다신 어루만질 수 없는 건지, 더 나아가 이젠 그 더러운 성깔에 대해서 꾸중 한마디 할 수 없도록 짖음도 입질도 없는 건지.
그저 보고 싶다. 죽음은 생각보다 물리적인 개념이었음을 깨닫는다. 사진도 영상도 추억도 잔뜩 남아 있지만 단 하나 없는 건 그 체온이다. 차가운 구슬로만 남은 나의 개는 이제 나와 물리적으로 닿을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여기에, 내 개는 어딘가 여기가 아닌 곳에 있다. 다른 우주에, 다른 차원에, '무지개다리'를 건너면 나온다는 그곳에. 이 가슴 저미는 그리움을 너는 가지고 있지 않기를, 나를 아예 잊었기를 바란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악몽으로라도 사랑했던 사람의 기억에 남고 싶었던 나에게 이렇게 순하고 정말 온전한 사랑이 있었다니. 그것을 다 개가 가르쳐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