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이 받아들여진다는 것
카페에서 글을 쓰고 집에 가는 길에 타코가 먹고 싶어서 타코집에 들른다.
'포크타코 주세요.'
'고수 들어가는데 빼드릴까요?'
'고수 넣어주세요.'
다른 식재료와 달리 고수는 당사자가 빼달라, 넣어달라 하기 전에 먹을 수 있는지 여부를 친절하게 물어봐준다. 취향을 적극적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식재료 중 하나가 고수인 듯 하다. 고수를 못 먹는다고 말했을 때 사람들은 그리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지 않는다. '고수 못 먹을 수 있지'라고 인정해주고 수용해준다. 김밥에 오이를 빼달라, 샌드위치에 올리브를 빼달라는 것보다 타코나 쌀국수에 고수를 빼달라는 것에 대해 너그럽다. 오이나 올리브를 빼달라는 건 당사자가 먼저 말을 꺼내야하는 경우가 많지만, 고수만큼은 먼저 물어봐줄 때가 더 많다. 까탈스럽다고 바라보지 않으니 시선의 온도가 차갑지 않다.
우리 사회는 왜 고수에 관대한가? 차갑지 않은 이 시선은 어디에서 왔을까? 특정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에게 고수는 비누맛이라고 한다. 손 씻을 때 필요한 게 비누지, 뭘 먹고자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게 비누는 아닐 테고, 게다가 비누맛이라니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본인에게는 고수가 비누맛으로 느껴지지 않더라도 일부 사람들에게는 생물학적 이유로 비누맛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하니, 비누맛을 한번쯤 떠올려보면 못 먹는 사람의 취향을 존중하게 되는 듯 하다.
고수가 들어간 타코를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고수의 호불호에 관대하고 너그러운 만큼, 서로의 다름에 대해서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해줄 수 있다면 어떨까? 고수와 다양성을 연결지어 생각해본 데는 내 삶을 관통하는 단어인 '이방인'이 크게 한 몫을 한다. 이방인만큼 나를 잘 표현하는 단어가 또 있을까라고 생각하면서 '이방인'을 나의 핵심 단어로 명명했고, 불분명했던 자기개념을 선명한 언어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심리학에서 자기개념은 자신에 대한 인식과 평가의 총체라고 하던데, 나는 '이방인'이라는 단어를 통해 나의 자기개념을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덕분에 나의 다름을 조금 더 너그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세상에는 고수 먹는 사람과 못 먹는 사람이 있듯, 생각보다 다양하고 다채로운 사람들이 많이 있음이 받아들여지면 좋겠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조금씩 헤아려주면 좋겠다. 한 달 전부터 극적으로(?) 고수를 먹게 된 나는 고수를 못 먹는 사람의 마음도 이해하고, '고수가 얼마나 맛있는데'라는 사람의 마음도 이해한다. 늘 경계에 있었던 이방인인 나는 소속되지 못 해 슬플 때도 많았지만, 양쪽 모두를 관찰하며 다수의 마음도, 소수의 마음도 이해하게 되었다.
김밥에 들어가는 오이가 맛있다 느끼고, 샌드위치에 들어가는 올리브가 맛있다고 느끼며, 한 달 전부터 타코와 쌀국수에 들어가는 고수도 맛있다고 느끼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취향일 뿐, 옳고 그름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려 한다. 내가 이해받고 싶었던 만큼, 세상에 당연하고 원래 그런 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려 한다. 다름에 너그러운 어른으로, 노인으로 그렇게 나이 들어가고 싶다
- 고수를 처음 접하고 오만상을 다 찌푸렸던 게 십 몇 년 전인 것 같은데, 정말 오랜만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고수를 시도해본 결과, 한 달 전부터 고수를 먹게 된 기념으로 적어보았습니다. 인생은 참 재미나네요. 제가 고수를 먹을 줄이야. 저처럼 고수 못 먹다가 고수 드시게 된 분 계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