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해외여행러버가 시큰둥이가 될 때까지

한때 열렬히 사랑했습니다, 해외여행을

by 낯선 도시

한때 지인들이 재미로 부르던 내 별명이자 호(號)는 호천이었다. 호기심 천국의 앞글자를 데려와 만든 두 글자. 호천 선생의 호기심을 강렬하게 충족시켜주는 것은 바로 해외여행이었다. 해외여행은 자극추구의 끝판왕이다. 공항에 내려 건물을 빠져나와 처음 맞이하는 바깥 공기에서 그 나라, 그 도시 특유의 향이 코를 스친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언어가 귀에 들려온다. 조금은 익숙한 영어일 때도 있지만, 프랑스어, 중국어, 일본어, 때론 아랍어가 될 때도 있다. 오감이 반응한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부터 온도와 습도에서 느껴지는 촉감까지. 이제부터 접하게 될 음식은 또 어떤 경험과 어떤 느낌을 전해줄지 호기심이 가득 차오르며 흥미가 보글보글 끓어오른다.


해외여행을 사랑했다. 비행기표를 끊고 나면 D-DAY까지 숫자 세는 맛에 하루하루 버틴 직장인 시절이었다. 뉴욕, 샌프란시스코, 보스톤, 하와이, 런던, 파리, 지베르니, 프라하, 로마, 밀라노, 피렌체, 바티칸, 티볼리, 두바이, 시드니, 골드코스트, 브리즈번, 싱가포르, 홍콩, 마카오, 발리, 베이징, 상하이, 타이베이, 호이안, 다낭, 도쿄, 후쿠오카, 오사카 그리고 방콕 등. 대도시부터 시골 마을까지 두루 다녔다. 누군가에겐 많아보이는, 또 누군가에겐 아직 갈 곳이 많아보이는 나의 해외여행 지도.


사랑에 이유가 있다면, 이제는 한때의 사랑이 되어버린 데도 이유가 있을까?


해외에 나가면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나를 알아볼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확신 속에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으며, 나의 감정과 생각, 경험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다. 일상에서 나는 남들의 시선을 예민하게 신경쓰며 하루하루 긴장했다. 평상시 나의 긴장은 CEO급이었다. 퇴근길 마사지숍에 들른 어느 날, 실력 좋던 마사지사는 나에게 말했다. '아이구. 언니 어깨가 완전 CEO급 긴장이네'. 속도 없이 나는 '긴장'이 아니라 'CEO'에 방점을 찍고 말았다. 얼굴에 미소가 번진 건, 이번 생에서 나와 인연이 없을 CEO를 선사해준 고마운 분이라서 그랬을까.


긴장이 너무 높아 긴장하고 있는지조차 인식이 안 되던 나는, 일상에서 내면과 외면의 경계가 매우 선명했다. 내면은 온데간데 없고 타인의 시선을 중심으로 외면에만 집중했다. 그러다 해외로 나가면 이 경계가 흐릿해지면서 지금 여기(here & now)를 모든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자유로움을 느꼈을 거라 짐작한다. 해외여행지에서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은 외롭지 않았다. 혼자 가는 해외여행은 오롯이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울 수 있었다. 그림을 좋아하는 나는 파리의 미술관에서 그림 보는 순간을 즐겼다. 파리에서 혼자 기차를 타고 지베르니로 가서 모네의 그림을 실컷 보고 온 날은 잊을 수가 없다. 그림과 나 사이에는 온몸을 타고 흐르는 전율만 존재했다.


나라는 존재가 비행기를 타는 동안 유체이탈 후 다른 인격이 된 것도 아닌데, 외로웠다 외롭지 않게 되었다니 이 무슨 신통방통한 조화인가. 나는 그대로였다. 다만 내가 나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었다. 이방인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그래. 그게 나지'. 부정하지 않는 것. 주변을 신경 쓰기보다 나에게 집중하는 것. 그리고 그 경험을 천천히 소화시키며 나를 고스란히 느끼는 것.


오감이 반응하는 건 분명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행복의 기원'이라는 인생책을 만나면서, 오랜 기간 행복의 빈도는 등한시 하고, 행복의 강도만 추구해왔다는 사실을 배웠다. 해외여행이라는 오감 만족 끝판왕의 강도 높은 자극을 추구했으나, 연 1회, 많아야 연 2회라는 낮은 빈도로 경험하며 행복을 자주 느끼지 못 했다. 여행을 준비하며 D-DAY를 세는 과정은 설렜지만, 여행 일정의 절반이 지나면서부터는 돌아갈 생각에 급격하게 의기소침해졌다. 또 언제 나갈 수 있으려나. 기약 없는 기다림.


인생이 별 거 없다는 말은 자칫 비관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이제는 그 말의 의미에 고개를 끄덕인다. 강렬한 한 방을 하염없이 기다리기보다 작고 사소한 것들을 자주 느끼고 경험하는 것. 그 속에서 나를 발견하는 것의 의미와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글을 쓰다 문득 2018년 방콕 여행 이후 오랫동안 해외여행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해외여행은 낯선 도시에 나를 데려가 또다른 나를 만나게 해주는 장치임에는 틀림없다. 이제 더 이상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시간을 부정하지 않으며 고스란히 안아줄 수 있게 되었다면, 그리고 내면에 집중하면서 CEO급 긴장이 부장급 긴장 정도로 내려왔다면, 오랜만에 부장님 가까운 해외로 여행 한번 보내드려도 되려나. 시큰둥이는 문득 한때의 사랑이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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