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밥심 1. 수박
그 시절 다른 집들도 그러하듯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먹는 간식이었습니다.
"수박 먹자"는 할머니 말씀에
늘이는 부엌에서 스뎅 숟가락을 하나 들고
우리의 '약속장소'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현관 맞은편_
안방과 서재 사이에 있던 그 복도.
그곳이 바로 이 시간 늘이의 집에서
가장 시원한 장소이니까요.
이 바람길은 그녀의 할머니가 알아냈습니다.
할머니는 에어컨은 틀지 몰랐지만,
집에서 가장 시원한 장소를 알고 있었습니다.
위로는 바람이 지나가고
밑에는 시원한 대나무 돗자리를 깔고 앉아
수박을 먹노라면,
어린 시절 이보다 더 시원한 추억은 찾을 수가 없을 겁니다.
숟가락으로 수박 안쪽에 있는 달큰한 속살을 다 먹어갈 때 즈음,
할머니는 하얀 단지에서 설탕 한 숟갈을 퍼서 솔솔 뿌려주십니다.
남아있던 빨간 속살마저 단숨에 없애버리는 할머니의 마법이었습니다.
구십 평생 소박한 밥상을 차려먹던 할머니도 이렇게 설탕을 '플렉스'하는 날이 있었습니다.
수박을 남기는 것은,
할머니 적성에는 맞지 않는 일이었나 봅니다.
**
"이거 설탕 쳤나 보다"
"왜 이렇게 달아 "
이제는 에어컨을 틀고 식탁에 둘러앉아 시원한 수박을 잘라먹습니다.
돗자리도 없고, 바람길도 없습니다.
의자는 4개,
나는 남편이랑 우리 아이들과 함께 수박을 먹지요.
그럴 때마다 선풍기만 켜고 먹었던 그 수박이 더 시원했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물론 아이들 아무도 믿지 않지만요.
주제는 금세 지금 보는 티브이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수박이야기는 이렇게 엄마의 한물간 추억팔이로 남습니다.
뭐, 혼자 알아도 되는 느낌이 있습니다.
혼자서 꼭 간직해야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아 놓으면 ,
다시 싹을 틔우는 거름이 되곤 합니다.
시들려고 해도 시들 수가 없습니다.
나는.
할머니 덕분에_
시원한 수박만 생각해도 항상 마음이 따뜻합니다.
싹싹 베어 먹고 기운을 냅니다.
수박을 남기는 것은,
나의 적성에도 맞지 않는 일이니까요.
**
안녕하세요.
여름이 지나가는 이 계절에 짧은 글로나마
시작하게 되어서 참 다행입니다.
수박 이야기는 꼭 처음으로 쓰고 싶었거든요.
힘들고 하루하루 지쳐갈 때마다
제게 힘이 되어주는 많은 추억들이
음식이라는 이미지와 함께하더군요.
돌아갈 수 없는 그리움과 함께요.
그래서 글을 안 쓸 수가 없었습니다.
더 미룰 수가 없었습니다.
언젠가는 쭉 적어나가야 할 기억의 조각들이었습니다.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진심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