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도전은 2006년 5월 6일부터 2018년 3월 31일까지 13년간 총 563회 방영되었다. 2005년 4월 23일부터 시작한 무한도전의 전작이라 할 수 있는 무모한 도전과 무리한 도전 52회, 그리고 종영 후 방영된 특집회 3편까지 더하면 횟수는 더 늘어나서 618회가 된다. 영상당 재생 시간은 회차마다 달라서 초반은 60분이 조금 못 되었고 후반에는 평균 90분가량 되었다. 하루에 열 편 정도씩만 보면 두 달 안에 정주행이 가능한 분량이었다. 그러나 며칠 해 보니 수험생도 아닌데 일정을 너무 촉박하게 잡은 탓인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사실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석 달간 일회 완주로 목표를 수정했다. 하루에 여섯 편에서 일곱 편 정도만 보면 되니까 먹고 자고 씻고 멍도 때리고 게임도 하면서 여유 있게 매일의 목표량을 달성할 수 있었다. 계획대로 하루 분량을 시청하고 투두 리스트에 완료라고 체크하고 나면 일종의 성취감도 느껴졌다. 여름이 끝나기 전에 동석은 마지막 회와 특별판 세 편까지 포함해 618회분의 영상을 모두 시청했다. 매회 길이가 조금씩 달라 정확한 산출은 어려웠지만 평균 80분이라고 계산할 때 618 × 80분은 49,440분이니까 대략 오만 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동석이 방구석에서 무한도전을 정주행 하는 동안에도 현실의 세계는 바쁘게 돌아갔다. 기후 위기와 자연재해와 전쟁과 평화, 예방 가능한 인재와 예측 불가능한 사건 사고와 뜻밖의 즐거움과 기쁨까지, 때로는 절망적이고 때로는 희망적인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났는데, 그 모든 크고 작은 화제들 뒤에는 모든 것을 의미심장한 ‘짤’ 한 장으로 설명 가능한 무한도전이 존재했다. 어떤 참상과 어떤 폭력과 어떤 축제에도 무한도전에 등장했던 대사나 자막으로 설명 안 되는 일이 없는 것 같았다. 그것은 매우 적절하고 빠른 속도로 각종 커뮤니티에 동시다발적으로 올라왔다.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미리 준비해 두었다는 듯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좁고 어두운 방구석 곳곳에서 실내 자전거를 돌리며 무한도전 유니버스를 지속하고 확장시키려는 비밀 요원들이라도 포진해 있는 게 아닐까. 세계는 무한도전 유니버스 안에 있다는 형의 이론이 어쩌면 형만의 병적인 관계망상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동석은 뒤늦게 하게 되었다.
누군가는 이 년이나 공부해서 힘겹게 합격한 공무원도 때려치우고 방구석에 처박혀 이미 몇 년 전 종영한 예능만 보다니, 사람이 형편없이 망가졌다고 평가할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게 사실에 더 가까울지도 몰랐다. 그러나 동석의 생각은 달랐다. 시간을 허비한다는 기분은 조금도 들지 않았고 또 다른 수험 생활을 시작한 듯 긴장과 열의마저 느껴졌다. 언제나 동석의 곁에 매우 가까이 존재했지만 한 번도 관심 있게 지켜보지 않았던 무한도전이라는 유니버스를 진지하게 탐색하는 탐험가가 된 기분이었고, 그것은 삼십 년 넘게 함께 살아왔으나 그 내면의 어둠과 혼돈에 대해서는 한 번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이해할 생각을 하는 순간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블랙홀 속으로 같이 떨어질까 봐 두려워 줄곧 멀리서만 지켜봐 온, 형의 우주로 들어가는 가장 밝고 환한 일종의 웜홀을 통과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웜홀을 통과하는 동안 그곳에 몇 개의 분실물을 두고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작은 브로콜리였다.
형의 첫 기일 날 용인의 봉안당에 가서 잘 있구나, 잘 있어 인사를 하고 돌아와 저녁을 먹으려는데 영 입맛이 없었다. 뭔가 맛있는 걸 먹자 싶어서 고민하다 동석이 떠올린 게 형의 장례식장에서 먹은 샐러드였다. 참깨 소스에 아삭한 셀러리와 사과와 감자, 아몬드와 그것이 들어간 샐러드인데 유독 입에 맞아서 선애 씨와 마주 앉아 이거 맛있다, 왜 전에는 이걸 샐러드에 넣어 먹을 생각을 못 했을까, 중얼거리며 여러 번 가져다가 먹었다. 이게 그렇게 건강에 좋다더라, 오래 살자면 이런 걸 먹어야 돼, 둘이 신나게 떠들며 나중에 같이 만들어 먹자 했는데 선애 씨가 제주도에 눌러앉는 바람에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만들기 어려운 것도 아니어서 오늘 만들어 보자, 하고 재료를 사러 집을 나서는데 그것의 이름이 영 생각나지 않았다. ㅂ으로 시작하는 네 글자 채소인데 이름이 뭐였지. 초록색의 복슬복슬한, 남들에겐 다 어려운 그림을 혼자만 쉽게 그리며 참 쉽죠,라고 사기 치던 밥 아저씨의 아프로 머리를 닮은 채소인데. 아프로라는 단어도 생각나는데 그것의 이름만 생각나지 않았다. ㅂ로 시작해서 ㅋ이나 ㅍ 같은 파열음이 들어갔던 것 같은데 뭐였더라. 아예 생각나지 않으면 모를까 포함되는 자음이나 몇 음절인지는 기억나는데 뒤섞인 자음과 모음이 만나 완성된 단어의 형태가 떠오르지 않으니 더 답답했다. 마트에 도착하기 전에 알아내고 싶었는데 마트는 고작 집에서 오 분 거리였고. 채소 코너에 있는 그것의 이름은 한 송이에 2,800원 하는 브로콜리였다. 수입은 1,900원, 유기농은 3,980원.
잊지 말자 브로콜리, 파프리카 아니고 보리꼬리도 아니고 브로콜리 브로콜리 중얼거리면서 한 송이를 사 들고 오는데 집 앞에 제주도에서 온 택배 상자가 있었다. 열어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브로콜리겠지. 네 송이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게 쪼개어 데친 후에 사과와 감자, 아몬드를 넣어 샐러드를 만들었는데 아무리 먹어도 도통 줄지가 않았다. 사진을 찍어 메신저로 선애 씨에게 보냈다.
- 브로콜리 샐러드 만들었어.
- 맛있니?
- 별로.
- 그래 보여.
- 먹으러 와.
- 별로라며.
- 그러니까. 맛있으면 혼자 다 먹었겠지.
- 못됐네.
- 이제 알았어?
- 그럼 됐어.
- 뭐가 돼.
- 여전히 못된 거 보니까 잘살고 있네.
- 엄마 닮아 그렇지. 그래서, 엄마는 언제 올 건데?
- 때가 되면.
- 그놈의 때는. 그럼 이 많은 걸 혼자 다 어떻게 해.
- 나눠 먹어.
- 누구랑?
- 이웃이랑.
참나. 동석은 어이가 없었다. 엄마와 형이랑 살 때도 이웃과 교류가 없었는데 이웃이라니. 직장도 관두고 혼자 사는 서른 넘은 남자가 이웃과 친밀하게 지낸다면 그게 더 수상하고 위험해 보일 수 있다는 걸 엄마는 모르는 걸까. 제주도에 가서 이모들과 같이 지내다 보니 이곳 생활이 어땠는지 다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아무렇지 않게 이웃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거겠지. 엄마라도 다 잊었다니 되었지만. 동석은 왠지 진 기분이 들었다. 엄마는 제주에서, 동석은 이곳에 남아 형이 없는 일 년간 누가 더 재미있고 신나게 사나 경쟁을 한 것도 아닌데. 아니, 경쟁을 하고 있었나. 아무래도 엄마가 이긴 거 같았다. 이웃과 나눠 먹으라니 허 참. 그것도 파프리카를. 아니, 파프리카가 아니라 뭐더라 브로 시작하는 네 글자, 그러니까, 브루클린 아니라 블루클럽도 아니고 그래 브브브 브로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