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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영 Mar 14. 2023

이달의 이웃비

4. 존 쿠삭을 기억함



   브로콜리 판매를 끝낸 후 동석은 이웃과 거래할 목록을 정하기로 했다. 브로콜리처럼 한 번씩 지워져 희미해진, 남은 인생에서 완전히 삭제해도 좋을 이름들이었다. 그렇게 해서 두 번째는 존 쿠삭, 세 번째는 갈까마귀로 정해졌다.

   그렇다면 존 쿠삭은 어떻게 없애야 할까. 존 쿠삭을 없애기 위해 동석은 그를 잊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잊은 것은 기억하려 애쓴 그 찰나에 발생했다. 그날 형과 같이 무한도전을 보는 대신 방문을 닫고 혼자 본 영화에 나온 배우의 이름이 영 생각나지 않았는데 그가 존 쿠삭이었다. 그렇다면 존 쿠삭을 없애려면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부터 없애야 했다. 그리고 동석이 본 존 쿠삭의 출연작들,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와 <브로드웨이를 쏴라>, <세렌디피티>도 함께. 없애야 할 영화가 점점 많아졌다.

   원본 필름이나 OTT 플랫폼에 올라온 영상을 모두 삭제하는 건 불가능했고 필요도 없었다. 동석이 가진 영화의 기억들만 판매 가능한 형태로 바꾸면 될 터였다. 막상 더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하자 아쉬움이 남아 오래전에 봐서 기억이 희미해진 영화들을 다시 찾아보기도 했다.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웃기는 장면은 더 웃기고 슬픈 장면은 더 슬프게 느껴졌다. 새로운 기억이 새겨졌으나 곧 지워질 기억들이었다. 영화를 본 감상을 짧은 시로 적어 이웃 마켓에 올렸다.


      <존 쿠삭을 기억함>     

  

      존 말코비치도 되지 못하고

      사랑은 리콜되지 않는다.

      세렌디피티여 안녕.

      브로드웨이도 쏘지 못한 채

      바이 바이 존 쿠삭.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 존 쿠삭 추모 세트 9,900원.     


   왠지 모르게 노래 가사가 따라붙었고. 그러나 이것만 판매할 수는 없었다. 존 쿠삭의 영화를 보며 먹었던 기린 맥주와 나초도 함께 제공하기로 했다. 맥주 브랜드는 많으니까 하나쯤은 남은 생에서 얼마든지 없애도 상관없었다. 올리고 나서 이틀 동안 존 쿠삭이 죽었느냐는 문의가 두 건, 존 쿠삭 피겨를 파느냐는 문의가 한 건 있었다. 누군가는 존 쿠삭 주연의 영화 DVD 세트나 존 쿠삭 굿즈를 판매하는 거냐고 물었는데 동석이 가진 존 쿠삭에 대한 소유권 전부를 이전하는 거라 하자 재밌네욤ㅋㅋ 하고는 그만이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바로 구매하겠다고 나선 사람은 배순경뿐이었다.

   맥주와 나초도 포함이니까 9,900원이 터무니없는 가격은 아니었지만. 사실 그걸 원한다면 마트에서 손쉽게 구매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굳이 번거롭게 웃돈을 주며 이웃 마켓의 직거래를 이용할 이유가 없었다. 자신이 사려는 게 뭔지는 아는 걸까 궁금해져 동석은 병식의 거래 내역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배순경의 이웃 마켓 활동은 매우 규칙적이었다. 일주일에 하나씩, 이만 원이 넘지 않는 물건만을 동네에서 직거래로 구매했는데 품목은 다양했다. 슬리퍼나 호두까기 인형부터 고양이를 위한 배변 훈련용 모래나 유아용 헝겊 모빌도 있었다. 슬리퍼는 덩치 큰 그에게는 너무 작은 사이즈 같았고 고양이도 아이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이런 건 왜 사는 걸까. 어쩌면, 어쩌면 말이다. 이웃들에게 더 이상 필요 없어진 ‘쓸모없음’을 그들이 원하는 작은 보상을 지불하고 가져감으로써 그들에게 쓸모 있는 이웃이 되고 싶은 게 아닐까. 저를 이웃으로 받아주세요. 여기 이번 주의 이웃비를 드립니다. 그날 동석이 존 쿠삭을 없애고 병식에게 받은 이웃비는 반값 할인된 4900원이었다. 병식에게는 제 값을 다 받기가 좀, 그랬다. 그것이 병식에 대한 동석의 기울어진 관계인식의 기본정서였다. 아무래도 좀, 그렇잖아.      




   세 번째 판매 품목으로 이웃 마켓에 갈까마귀를 올린 건 처음부터 배순경을 만나기 위한 목적이었다. 다행히 갈까마귀를 없애는 건 존 쿠삭을 없애는 것보다 간단했다. 동석에게 갈까마귀는 애초에 에드거 앨런 포의 시로만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시를 종이에 옮겨 적으며 다시 한번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하는 시였다.


  어느 쓸쓸한 한밤중, 고단하고 고달픈 내가
  무수히 잊힌 기이하고 신비한 민담을 골똘히 읽다가
  꾸벅꾸벅 거의 졸던 중에 불현듯 들리는 똑똑 소리.
  누군가 부드럽게 내 방문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
  나는 중얼거렸네. “누가 와서 내 방문을 두드리나,
  뭐 그뿐, 더는 없어.”     


  갈까마귀의 판매 가격은 10,900원. 다소 비싼 가격을 붙인 것은 혹시라도 다른 구매자가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서였다. 사실 배순경이 아니면 누가 중고 마켓에서 갈까마귀 같은 걸 사겠다고 하겠냐마는. 그래도 그 가격에 시만 팔기에는 괜히 모자라지만 착한 친구를 속이는 기분이 들어 동석은 형이 아끼던 책을 한 권 들고나가기로 했다. 동석이 읽어 본 적 없고 앞으로도 읽을 일 없을 아주 두꺼운 안내서였는데 형은 주로 벌레를 잡을 때 그 책을 이용했다. 두껍고 무게가 나가서 벌레가 도망가지 않도록 눌러놓는 데 좋다고 했다.

   형은 겁도 없이 벌레를 잘 잡았다. 선애 씨는 늘 형이 벌레를 참 잘 잡는다고 칭찬했다. 형을 칭찬하기 위해 일부러 벌레가 나오는 집만 골라 이사를 다니나 싶을 정도였다. 덕분에 동석도 집에서는 제 손으로 벌레를 잡아 본 적 없었다. 벌레가 보이면 형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면 형은 두꺼운 책을 들고 나타나 용감한 영웅처럼 벌레를 눌러 압사시켰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후 천천히 책을 들추고 죽은 벌레를 휴지로 집어 버렸다. 그런데 왜 형은 벌레를 바로 잡지 않았지? 뒤늦게 동석은 그런 의문이 들었다. 물론 살아 움직이는 벌레보다 죽은 벌레를 집는 게 더 수월했을 테지만. 그렇다는 건 사실 형도 벌레를 잡는 게 무섭고 싫었던 거 아닌가. 하긴 누가 벌레 잡는 걸 좋아서 했겠는가. 어쩔 수 없으니까, 해야 되니까 하는 것뿐. 그렇다면 형도 실은 벌레가 무서웠던 건 아닌가. 형이 벌레를 잡는 용기를 애써 낸 건, 실은 너무너무 겁이 났기 때문이 아닐까. 어느 날 가족들조차 롤 케이크에 미안하지만, 으로 시작하는 배척의 말을 남기고 자기 곁을 떠날까 봐, 그런 식으로 자신의 쓸모를 증명했던 건 아닌가. 형 나름의 이웃비를 그런 식으로 지불하면서.


   다세대주택에 살 때 동석의 가족은 이웃에게 롤 케이크를 선물 받곤 했다. 이웃이 건네는 롤 케이크는 좋은 이웃에게 주는 선물이 아니라 나쁜 이웃에게 주는 작별의 선물이었다. 미안하지만 이사를 가 주면 좋겠다는 포스트잇과 함께였다. 그들은 매정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다만 형과 공간을 공유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을 뿐이었다. 무지에서 비롯된 형의 의도치 않은 격의 없음을 위협이나 폭력으로 느끼는 게 그들의 잘못은 아니었다. 이웃에게는 이웃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302호에 사는 초등학생 딸이 계단에서 마주친 덩치 큰 아이 같은 형의 ‘지나치게’ 친근한 인사에 울음을 터뜨렸다는 걸, 형이 남들보다 조금 큰 소리로 웃고 큰 소리로 울고 큰 소리로 혼잣말을 하는 것이 얇은 벽을 투과해 이웃들의 휴식을 방해한다는 걸 동석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몰래 두고 간 롤 케이크는 달콤했다. 그것을 먹으며 선애 씨와 새로 이사 갈 집을 찾아보는 게 그리 슬프거나 가슴 아프지 않았다. 이웃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동석도 그 이웃들과 같은 마음이었으니까. 가족이 아니었다면 형과 이웃이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 후로는 일부러 소음이 많은 상가 주택으로만 이사를 다녔다. 동석이 고등학생 때부터 공무원 시험에 합격할 때까지 살았던 4층 건물은 지하부터 2층까지는 음식점과 술집이, 3층에는 노래방이 있는 건물로 밤늦게까지 시끄러운 소음과 진동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그 건물을 ‘집’이라 생각하고 머무는 사람들은 동석의 가족뿐이었다. 그래서 부러 선택한 집이었다. 이런 소음 속이라면 형이 큰 소리로 웃고 울고 노래하고 외치는 소리들도 묻히고 이웃들의 원성을 듣지 않아도 될 거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은 옳았다. 더 이상 동석의 집만 빼놓고 반상회를 열어 집 앞에 롤 케이크를 두고 가는 일 같은 건 생기지 않았다.

   이웃이라 부를 만한 그 누구도 없었지만 그래서 안전한 나날이었다. 형 역시 가족 이외의 사람들과 교류하거나 접촉하는 일이 없도록 늘 주의를 주었다. 한 번은 외래 진료를 받으러 갔다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친하게 지냈다는 여자 환자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입원 시 면회를 갔을 때도 간호사들이 둘이 친하게 지내는 것에 주의를 주었던 기억이 났다. 둘이 작은 감정을 나누는 것은 연애가 아니라 사건이 되었다. 형과 둘이 반가워하며 연락처를 주고받는 것을 보고 여자 환자와 같이 온 어머니가 동석을 불러 부탁했다. 혹시라도 연락하는 일 없도록 해 주세요. 작은 외부의 충격에도 쉽게 부서지고 말 건조하고 지친 얼굴이었다. 조심시키겠다는 말 이외에 할 말이 없었다. 둘의 교류에서 여자 환자의 가족이 느끼는 불안은 또 다른 문제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형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형에게 이웃이 될 기회를 빼앗고, 형에게 이웃이 되려고 다가온 사람들을 차단했다. 때때로 형과 같은 병을 앓는 이들이 저지른 사건 기사를 접할 때마다 형에게는 그런 폭력적인 성향이 없음에도 형을 잠재적 가해자로 상상하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동석의 몸은 형과 같은 집에 머물렀으나 마음은 등 떠미는 이웃들의 편에 있었다.

   형의 동생으로 태어난 건 동석이 선택한 게 아니었다. 형의 동생인 것을 부정하거나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남들에게 차동석이 아닌 ‘형의 동생’으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았다. 동석이 평범한 이웃으로 살아가는 데 형의 존재가 방해가 되는 것도 원치 않았다. 그래서 형을 ‘없는 이웃’으로 만들었다. 누구보다 형을 나쁜 이웃으로 대한 건 사실 동석이었다.

   그런 동석이 지금 병식의 이웃이 ‘되어 주겠다’라고 애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건 반성도 후회도 아닌, 병식이 동석의 ‘사연’이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 오랜만에 만난 선배가 뭘 하고 사느냐 묻기에 동석은 중고 마켓을 한다고 했다. 아 거기 취직했어? 잘됐다, 해서 그건 아니고 그냥 중고 거래를 한다고, 소소한 걸 팔아서 생활비를 쓴다고 했다. 그러면서 거래하다 만난 배순경의 이야기를 했더니 선배가 꽤 재미있어하며 말했다. 돈이 필요한 거면 그걸 소재로 응모해 보면 어때? 그리고 선배가 알려 준 게 이음 캠페인 정보였다. 차별 없는 사회를 위한 연대와 화합의 축제를 위한 이웃 나눔 수기 공모전이라고 했다. 그날 이후로 병식은 동석이 최우수상 백만 원, 우수상 삼십만 원의 이웃 나눔 후기를 작성하는데 재미와 감동을 다 잡아 주는 ‘쓸모 있는 이웃’으로 자리매김했다.

   물론 누군가를, 그것도 사회적 약자임이 분명한 병식을 글쓰기의 소재로 이용한다는 데 대한 불편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본인이 아니면 주변인은 관련된 이야기를 할 자격이 없는 걸까? 최대한 무해하고 선량한 이웃으로 표현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이웃으로 받아들여 주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글을 쓴다면, 그래도 안 되는 걸까? 굳이 따지자면 동석 역시 무관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 적합성을 따진다면 최소한 50%는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마땅했다.

   평생을 경계성 지적장애와 조현병을 앓으며 단 한 번도 제 손으로 돈을 벌어 본 적 없는 형에 대한 책임감에 짓눌리며 살아왔다. 청소년기에는 선애 씨가 늦은 나이에 자기를 낳은 이유가 형을 같이 돌봐 줄 사람이 필요해서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형에게 또 한 명의 돌봄 가족을 만들어 주기 위해, 선애 씨가 죽은 후에도 형을 돌봐 줄 사람이 필요하니까 일부러 최대한 늦게, 아홉 살이나 차이 나는 늦둥이로 자신을 낳은 거라고. 그리고 그 믿음은 형이 죽기 전까지, 아니 죽은 지금까지도 동석의 마음에 남아 있었다. 그러니 자신은 형의 이야기를, 아니 병식의 이야기를 할 자격이 있다고 동석은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변명을 늘어놓았다.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거듭해서. 그리고 이음 커뮤니티에 병식의 이야기를 연재했다. 시작은 브로콜리였다.




인용 : <까마귀>, 에드거 앨런 포 지음, 권진아 역, 시공사, 2018,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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