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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의 근사(謹寫)한 벽화_국립고궁박물관

by 미술관옆산책로

너무 '근사한' 전시를 만났다. 사실 '근사하다'는 말로는 다 표현 못할 감동이 있는 전시다.


창덕궁의 근사(謹寫)한 벽화
2025. 8. 14 ~ 10.12
국립고궁박물관


친구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꼭 보고 싶은 전시가 있다한다. 나도 어느 기사에서 그 전시정보를 얼핏보고 마음에는 담아 두었지만 언제 갈지 정하지 못하고 희미해질 무렵 친구가 기억을 소환해주어 바로 가게 되었다.


전시의 타이틀은 <<'근사'한 벽화>>인데 '아름답다, 멋지다'같은 뜻의 '근사'가 아니라 '근사(謹寫)', 즉, '삼가 그리다, 그려 올리다'의 뜻을 갖는 것 부터가 매력포텐 터졌다.


전시는 당대 최고의 화원들이 최선을 다해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와 황후의 처소인 창덕궁내 희정당, 대조전, 경훈각 벽에 올린 그림이 소재다. 벽화이다 보니 그 규모가 장쾌하고 소재 또한 심혈을 기울인 티가 났다.


K-컬쳐가 소용돌이처럼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작금의 저변엔 덜 알려진 문화의 나이테로 켜켜이 쌓아온 내공들이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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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는 김규진을 필두로 김은호 이상범 노수현 등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들 외에 오일영 이용우까지 가세해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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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딱 6점


집무실인 희정당엔 <총석정절경도>와 <금강산 만물초승경도>, 침소인 대조전엔 <봉황도>와 <백학도>, 그리고 경훈각엔 <조일선관도>와 <삼선관파도>가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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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정당에 걸린 (좌) <금강산 만물초승경도>와 (우) <총석정절경도>


입이 다물어 지지 않는다. 실제로 봐야 더 그렇다. 카메라 화면에 다 잡히지도 않고 다 잡혀봐야 그림의 디테일은 포기된다. 그러니 무조건 가서 내 숨이 그림에 누가 되지 않아 고마운 유리벽 뒤 그림을 샅샅이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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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만물초승경도> 김규진, 1920, 비단에 채색, 국가등록문화유산

<금강산 만물초승경도>는 이 벽화 프로젝트의 대장격인 김규진이 그렸다.


'세상만물을 유람하다' 라는 뜻의 이 그림은 작년과 올해 간송과 호암이 대대적으로 전시에 나선 <<겸재 정선>>展 때문에도 그렇지만 죽기 전에 꼭 금강산을 봐야할 당위를 하나 더 만들어줬다.


규모로도 놀랍지만 그 규모를 채운 디테일이 압권이다. 금강산의 호연지기같은 기세와 사이사이 여백을 만들어둔 구성, 가을인 듯 울긋불긋한 색채감과 이 모든 것을 꼼꼼히 세기듯 그린 디테일이 조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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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석정절경도> 김규진, 1920, 비단에 채색, 국가등록문화유산

<총석정절경도>는 또 어떠하리


이 그림도 김규진作이다.


바다 위 기암을 펼쳐 놓은 듯한 이 그림도 내 오해해 총석정이 우리 동해 바다 어드매인 줄 알았던 걸 친구가 북한땅에 속해 있다고 말해주어 아쉬움의 한숨이 깊게 나와 버렸다.


김규진이 실현해 놓은 총석정의 뾰족하고 삐죽하게 뻗어나온 기암괴석들은 지구의 시간을 새겨놓은 듯 영원의 힘을 발산하는 듯했다. 넘실대는 바다와 그 위에 솟아있는 괴석, 그림의 숨구멍 처럼 멀리 떨어진 보드라운 산등선의 오종종한 소나무들까지 기가 막힌 구성과 표현법이다.


비단은 시간이 지나면 그림의 색이 탁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 벽화들은 그럼에도 목적한 기품이 수그러들지 않고 깊게 배어 나와 신기했다.


금강산과 총석정을 감상하고 다음 방으로 이동하니 대조전에 걸려있던 <봉황도>와 <백학도>가 우리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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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도> 오일영 & 이용우, 1920, 비단에 채색, 국가등록문화유산

<봉황도>는 오일영과 이용우가 함께 그렸는데 둘이 그렸다고 말해줘야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림 속 합이 잘 맞았다. 설명판을 들여다 보니 그림을 그릴 당시 오일영은 31세, 이용우는 고작 19세. 31세의 젊은 화가는 19세의 어린 천재를 데리고 (아닐 수 있음) 작품을 완성했다.


젊은 화가진이 그린 푸른 봉황과 함께 모란, 바위, 대나무 등은 황실의 부귀와 번영을 기원한 화가들의 마음이었다.


소나무의 줄기를 봉황과 같은 청색으로 표현한 것은 실로 창의적이고 독특하다. 청색이 지배하는 그림은 기운생동하여 절로 번영을 끌어들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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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학도> 김은호, 1920, 비단에 채색, 국가등록문화유산

푸른 <봉황도>와 마주하고 유백의 <백학도>가 나부낀다.


이 그림은 김은호의 작품


앞의 봉황이 10마리였다면 조금 더 현실의 새인 백학은 16마리다. 이 곳에도 푸른색이 등장하여 그림의 기운이 젊고 에너지가 넘친다.


같은 공간에 마주보고 걸려질 그림이라 두 그림은 기획부터 같이 했나 보다. 그러니 마주한 그림의 같은 위치에 한쪽은 붉은 해를 (봉황도) 다른 한쪽엔 하얀달을 (백학도) 그려, 반으로 접으면 같은 그림이 나오는 데칼코마니처럼 만들었다. 소나무 줄기의 위치도 비슷하다. 해와 달, 소나무의 위치로 서로 마주할 그림의 뼈대를 결정하고 그 안에 봉황과 백학, 각종 꽃들과 바위, 물과 하늘을 넣어 그림의 통일성 뿐만 아니라 작가의 개성도 한꺼번에 즐길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그림에 사람이 없다. 조선의 그림엔 작지만 늘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그림 안에서 그림 속 시선으로 그림 밖 관람객이 그림을 감상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 4점엔 사람이 없는 거다.


친구와 이 포인트를 짚어 얘기 나누다 아마도 왕과 왕비가 보는 그림이라 그림 속에 범인들을 넣지 않고 온전히 왕과 왕비만이 그림의 전부를 즐길 수 있게 했나보다, 상상했다.


매우 그럴 듯 하지 않나.. 사실이야 어떻건 그림을 보며 이런 상상과 추론의 과정을 거치는 것은 언제고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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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선관도> 노수현, 1920, 비단에 채색, 국가등록문화유산

세번째 방에선 신선이 등장한다.


왕과 왕비가 보는 그림이라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가보다.. 추론해놓고는 사람이 등장하여 '아닌가...'했었는데 그림속 인간은 사람이 아니라 신선이라 가능했다고 상상했다.


<조일선관도>는 신선이 보는 이른 아침의 해돋이 모습인데 100년 후 지금의 서울에서도 볼 법한 일출의 모습이 포함되 나와는 심리적 거리감이 가장 가까운 그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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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선관파도> 이상범, 1920, 비단에 채색, 국가등록문화유산

이 그림은 그림 좌하단 세명의 신선이 각자 얼마나 오래 살아왔는지 허풍을 떨며 파도를 감상하는 그림이다. 파도가 주요 대상인데 그림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쭉 훑고 오는 동안 파도를 닮은 거친 대지 위 잘생긴 소나무들에 한껏 마음을 빼앗기긴 했다.


신선들의 허풍이 심히 위트있고 재미진데, 이것이 왕과 왕실의 무병 장수, 번영을 기도하는 의미로 선택된 소재여서 고개가 끄덕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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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강력한 전시들이 있다. 이 <<창덕궁의 근사한 벽화>>전이 그렇다.


작품은 딱 6점, 그 수준과 의미는 600점을 보고 나온 느낌이 들 정도로 강력하다.


하나 덧붙이자면 눈썰미 좋은 친구는 모든 그림의 같은 위치에 다각형 문양의 빈 공간이 있는 것을 보고 그림이 달린 벽의 모양새가 저러해서 저위치가 비나보다.. 추측했다. 나오면서 찬찬히 전시관련 동영상을 보다 보니 익숙한 모양새의 건축구조물(이름 모름)이 그 위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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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표처럼 그림 상단양 귀퉁이에 비슷한 문양의 빈 부분이 있다.
SE-6c5a5d94-d879-4bd1-a114-a351185e3626.jpg?type=w1 그 빈 부분은 위 그림 화살표가 표시한 것 처럼 방 모서리 건축구조물이 있던 자리였다.

참고 사진을 찾아보니 건축구조물은 실제 이런 모양이고, 벽화는 바닥부터 천장까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문위쪽 벽부터 천장까지를 장식했던 것이었다. 황제의 처소를 일반 양반집 정도로 생각했다가 '아쿠쿠' 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실이었던 창덕궁은 천고가 높고 장식물이 많은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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