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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나 Apr 28. 2024

단편: 이타

나는 나미와 함께 유청으로 내려왔다. 나미는 자신이 잘 모르는 지역이었는데도 내가 유청을 택하고 싶다는 이유로 그곳에 대한 망설임이 없었다.


나미는 많은 사람과 어울려도 친밀한 사람을 잘 두지 않았지만 한 번 마음을 주면 몇 년을 유통했다. 나미에게 친밀함이란 곧 믿음이었다. 그 사람이 무엇을 해도 믿어주는 것. 나는 그런 나미를 걱정했지만 나미는 모든 관계에 회의적이었던 내게 스며들어 나를 바꿨다.


나는 나미가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고 그게 나미에게 미안했다. 나미는 내가 없어도 잘 살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미는 달리기도 얌전히 있는 것도 잘하고 무엇보다 쉽게 밝아졌다. 혼자서도 하루하루 많은 것들에 즐거워하고 행복해했다. 나미의 성정은 내 일상을 밝게 만들었다. 나미 덕분에 삶을 기대할 수 있었다.


삶을 포함한 모든 것에 대해 나는 끝을 생각했다. 그 마음으로 나는 누구에게 호감이 있다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시간에 고민하지 않았다. 사실 이건 나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멀어져도 후회가 남지 않았고 내가 더 많은 마음을 받는 것보다 더 많은 마음을 주는 게 늘 편했다. 그러나 영원을 불신해도 나미로 인해 바뀐 내 일부는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이라 예외로 믿었다.


나미는 방어기제이기도 한 마음을 가진 나와 달랐다. 나미는 끝을 미리 생각하지 않았다. 누군가와의 끝이 와도 나미에게는 죽음이 아니라면 끝을 생각하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가 싶기도 했지만 나미는 나처럼 좋은 순간에 슬픔을 자주 감각하는 성정이 원체 아니었다.


나 같은 사람보다 나미 같은 사람들이 더 주류였지만 나는 그게 신비했다. 나와 비슷한 생각하는 사람들의 글을 언뜻 보면서 안도하기도 했지만 나는 내가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나는 내가 느끼는 감정보다 덤덤하고 의연하게 삶에 대응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남들에게 나의 슬픔이 들킬 때마다 내가 미성숙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는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을 바라지 않았다. 나 자신이 어떤 말을 듣고 싶은지 알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내가 위로받는 마음을 자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았다. 나는 아무것도 기대하면서 살지 않다가 종종 생각지 않은 위로를 받았다. 그래서 기대를 편하게 하는 사람이 부러웠고 감정 폭이 0에서부터 시작하는 듯한 사람이 아닌 내가 비정상이라 느껴지기도 했다.


나미는 일상의 감정이 기쁨인 사람이었고 나는 슬픔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입 밖으로 꺼낸 적 없지만 나는 나미에게 손해를 주지 않나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나미는 내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에 놀라겠지. 내게 그러지 않다고 말할 나미의 목소리가 선했지만 나는 내가 그 말을 들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막혀있는 내 감정을 풀거나 합리화하지 않아야 했다. 나는 자주 내게 벌을 주지 않는 것보다 벌을 주는 게 편하다고 느꼈다.


나미는 슬픔의 지속성이 약해서 잘 우는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슬픔의 빈도가 잦았으나 나미보다 덜 우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나미가 내 얘기를 듣고 운 적이 있었다. 나는 그것에 위로를 받았고 그 마음을 느낌으로써 내가 내 자신에게 이기성을 들통 낸 기분이 들었다.


나미는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자주 말해주면 한다고 했지만 나는 기쁘지 않은 감정이 말랐을 때가 되면 정제를 거쳐 말을 검열해 스치듯이 가볍게 일부를 꺼냈다.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의지하는 게 어려웠다. 내가 전부 다 알아서 해야 한다는 의무적인 마음이 당연했다. 오래전부터 그렇게 생각해 와서 그게 나라는 사람 같았다.


나는 내가 듣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 듣고 싶지 않은 말을 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 말을 잘 잊지 못해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그 말을 꺼내지 않는 게 예의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나미가 내게 자신이 듣고 싶지 않은 말과 자신의 상처를 주저하지 않고 나처럼 감정을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다 이야기해 주는 게 좋았다.


나미의 말을 듣고 나미와 대화하면서 나는 문득 내가 나 자신을 이해해 주려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나미가 너는 그런 사람인 것 같다고 말해준 것도 아니었는데 내가 말하다가 내가 나에 대해 깨닫는 지점이 많은 게 놀랍기도 내가 멍청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고 살면서 어떤 내 일부는 이제야 깨닫는 것이 눈치 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내가 판단적이며 구부러졌다가 돌아오기보다 꺾여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비가역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미는 풀리지 않는 고민을 하면서도 가역적으로 돌아오는 내가 좋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나미가 풀 수 있는 고민을 하고 그것들을 푸는 나미가 좋았고 언젠가 다시 내게 돌아오지 않아도 좋았다. 나는 나미가 이미 나미라서 좋았지만 나도 모르게 이유를 생산해 내 감정에 당위를 덧붙이는 놀이를 했다. 나미는 내 우상이었다.


나는 내가 아는 나미를 나미가 모를 때 알아채는 게 좋았다. 나를 나미에게 다 보여주지도 못했지만. 몇 년 전에 나미는 나와 사귈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넘치는 것이 두려웠다. 나는 깊은 관계가 두려웠다. 나는 가족과 사회로부터 삶을 참으면서 내가 관계를 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을 때 깊은 관계를 형성하지 않을 거라고 결의했다. 그러나 나는 나미와 연인이 됐을 때를 나만 나미를 알았을 때부터 수없이 상상했다. 친구여서 넘어갈 수 있던 일이 연인이어서 넘어갈 수 없는 일이 될 것이고 나는 연인에 대해 기대를 할 것이고 유년부터 가족이나 친구가 해주었어야 할 사랑을 바랄 것이고 그 바람으로부터 내가 나를 괴물이라 느낄 것이라고. 나는 그 누구와의 미래를 그려본 적이 없었기에 그 가정이 최악이라 생각지도 않았다. 내가 상상하지 않은 최악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나미에게 사귈 수 없다고 했다. 나미는 어쩔 수 없네 하고 웃었다. 그게 다였다. 나미는 1달이 지나서 동갑 여자애랑 사귀고 1년 반 정도가 되어서 헤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1살 많은 여자애와 사귀었다. 나는 나미의 고백을 거절하고 몇 달 뒤에 나미에게 동거를 제안받았다. 나는 나미와의 동거를 시작했고 몇 발짝만 나가면 나미가 있어도 잠이 오지 않을 때마다 나미를 생각했다. 그리고 나미의 이름을 연달아 속으로 외웠다. 나미. 나미. 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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