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발표작
남실바람이 불 때마다 겨자 빛으로 물든 느티나무 이파리들이 후두두 떨어진다. 한때 푸르른 그늘을 만들어주었던 나무 아래로 아이들이 낙엽 비를 맞으며 지나가는 시월의 끝자락, 우리는 김 선생님 집으로 향했다.
몇 년 전 월항리에 터를 잡은 선생님 집은 누런 들판을 앞자락에 두고 우람한 감나무 아래에 얌전하게 들앉아 있다. 담벼락에 그려진 세 편의 벽화시는 주인의 낭만적 성향을 드러내고, 뒤란의 작은 텃밭과 앞뜰의 꽃밭은 또 어찌나 정갈한지 분홍색 바늘꽃을 닮은 안주인의 바지런함이 한눈에 묻어난다. 선생님의 오랜 지인들도 먼저 와 있다가 우리를 반겼다. 조촐한 막걸리 파티와 작은 음악회를 책임질 ‘수태골 삼총사’라고 한다.
학교가 아닌 곳에서 서로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만나 나누는 이야기는 다양하고 즐거웠다. 노벨문학상에 대한 소견을 시작으로 천체 사진과 주말 음악 봉사활동이며 옛날의 교사상, 들꽃이야기까지 웃음과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쌀쌀한 바람이, 알싸한 청양고추가 등줄기를 서늘하게도 했지만, 삼총사들의 투박하고 정감 어린 연주가 마음까지 말랑말랑하게 풀어줬다. 정년을 앞둔 교감 선생님이 수십 년 교직 생활에서 경험한 수많은 만남 중 손꼽힐 정도로 색다른 자리이고 의미 있는 시간이라 하시자, 얼큰해진 집주인 선생님이 그 자리에서 바로 우리에게 이 만남의 평생 회원권을 발급하셨다.
“와! 저것 봐.”
불현듯 들리는 누군가의 탄성에 올려다보니 보름달이다. 하늘 나그네를 위해 남겨둔 홍시 몇 개를 빼고는 잎과 열매를 다 떨어뜨린 감나무에 크디큰 보름달이 한가득 걸려있다. 다 비워낸 감나무는 그 무엇보다 풍성한 가을을 품고 있었다.
문득 초임 시절, 시골 자취방 창호 문으로 비치던 감나무 무성한 잎이 떠올랐다. 가을 빛살에 반들거리던 감나무 이파리들이 혼자 잠드는 창호지문에 과장된 그림자를 만들어 댈 때면 무서움과 그리움으로 잠들지 못해 뒤척이곤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나도 사랑했던 이 시간을 놓아야 할 때가 되었다. 하지만 과연 아이들을, 학교를 놓을 수 있을까? 아이들이 없는 시간을 내가 잘 견뎌낼 수 있을까?뭐라 확실하게 규명할 수 없는 감정 덩이가 울컥 치밀어 오른다. 아이들에 대한 짝사랑을 내려놓기가 힘들다.
하지만 알고 있다. 저 감나무에 지금 잎이 무성하다면 달이 가려져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때를 알고 다 비워냈기 때문에 저렇듯 깊고 큰 보름달을 품을 수 있는 것이다. 잘 알면서도 욕심을 부리고 인연의 끈을 쉽게 끊어내지 못한다. 내 비록 나이 먹었지만, 늘 푸르게 피워내는 나무처럼 나도 세월을 품어온 만큼의 사려 깊음과 원숙미로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달콤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우기는 건지도 모른다. 욕심이 지나치면 독이 되어 쓴 열매를 맺게 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인내하고 희생하면서 새봄을 준비하는 나무의 마음도 읽을 줄 모르면서 아이들의 마음결을 살피겠다고 움켜쥐고, 나만이 튼실한 열매를 쥐어 줄 것처럼 바쁘게 설치기만 한 것은 아닐까? 이제야말로 내 안의 열매와 잎을 떨궈 기꺼이 거름으로 돌아가서 누군가의 몸통에 새로운 싹을 틔워야 할 때가 아닐까?
갑자기 교감 선생님이 어깨를 툭 치신다.
“뭘 넋 놓고 있어요? 달 보고 감탄만 할 게 아니라 사진도 찍고 그래야지. 혼자만 멍하니, 이거 감정이 너무 메마른 거 아닌가?”
“저는 벌써 가슴에 찍어놨답니다.”
“이건 또 뭔 소리! 사진으로 찍어서 확실하게 남겨야 감동도 간직되는 거지.”
“보름달도, 초승달도 다 따서 담았기 때문에 사진 안 찍어도 돼요.”
티격태격하는 국어과 늙은 여교사와 과학과 교감 선생님 때문에 함빡 웃는 일행들의 웃음소리가 해바라기 씨처럼 알알이 쏟아진다.
깊어가는 월항리의 가을밤, 주인장의 색소폰 음률이 어깨까지 따스하게 찰랑이고 있다. 이 시간이 지나면 이제 우리는 각자의 길을 갈 것이다. 남겨진 사람은 그 자리에서 더욱 단단하게 여물어갈 것이고 다른 세상으로 나가는 사람은 그곳에서 또 푸른 씨눈으로 새싹을 틔울 것이다. 이 첫 만남은 아마 마지막 만남이 될 것이다. 그래도 먼 시간이 흐른 후 우리가 떠올릴 시간 속에 아름다운 기억으로 공유될 것임은 밤하늘의 별처럼 분명하다. 이 밤 우리가 오롱조롱 쏟아놓은 감정들은 햇볕 짱짱한 아침이면 날 것으로 떠올라 어쩌면 우리는 홀로 민망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냉철하게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는 이 어정쩡하고 서툰 인간미들이 나는 좋다.
누구는 사진으로, 누구는 가슴으로, 또 누구는 적바림으로 그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따서 가슴에 품은 보름달이 모두의 어깨 위로 다정하게 흐르고 있는 밤, 가을에 취하고 음악에 취하고 사람에 취한 교감 선생님은 별자리를 찍으러 새벽 출사를 해야 하는데 자꾸만 갈지자로 발이 꼬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