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갚은 고양이 (13편)

50년 만에 화가의 꿈을 이룬 나의 미술, 음악 그리고 고양이 이야기

by 김경미

짧은 사회생활, 놓지 않던 진학의 꿈


대학 진학을 목표로 부기 1급 자격증까지 어렵사리 취득하기는 했지만 나는 결국 고3 여름방학이 끝나자마자 열여덟의 나이에 율산 중공업이라는 기업체에 취업할 수밖에 없었다.


율산 중공업은 알려진 대로 신선호라는 기업인이 율산실업을 모태로 급속히 계열사를 확대하며 운영하다 불과 몇 년 만에 몰락한 율산그룹의 계열사였다. 갓 열여덟을 넘긴 여학생이 몰락을 앞둔 기업에서 근무하며 느낀 실망감, 더 나아가 모멸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타자기를 두드리는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각이 너무나 절망스러웠었다. 결국 나는 견디지 못하고 율산그룹이 공중분해되기 직전 회사를 퇴직했다. 그러나 딱히 현실을 벗어날 별다른 방법이 없었으므로 지인의 소개로 당시 회현동 무역회관에 있는 아주 작은 수출조합에 다시 입사하여 열 달 가량을 근무했다.

그 수출조합의 직원은 모두 열 명이었고 여직원은 열아홉 살 가장 막내인 나를 포함하여 세 명이었다. 대기업과는 사뭇 다르게 나는 나에게 맡겨진 기본업무 외에도 가장 늦게 입사한 막내 여직원이라는 이유로 온갖 잡다한 일을 도맡아 해야 했다. 각각 한 살 터울의 언니들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마치 가부장적인 전통 가정에서 온갖 자질구레한 살림을 도맡아 살아온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모든 일을 내맡기며 군림 하 듯 사회생활에서도 당시 여성들은 철저한 남성 위주의 분위기에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고 서열을 명분으로 후배 위에 군림하며 여성들 간 또 다른 갈등을 야기했다.


나는 매일 가장 일찍 출근해 재떨이 비우기를 비롯, 전 직원의 책상을 걸레로 닦아야 했다. 모든 직원들을 위한 커피 타기와 커피잔을 씻는 일, 하다 못해 여직원들끼리 도시락을 먹고 난 후 언니들의 도시락까지 설거지해야 했다.


무엇보다 남성 간부들이 전날 밤 사무실에서 시켜 드신 야식 쓰레기를 다른 사람들이 출근하기 전에 치우는 일이 가장 하기 싫은 일이었다. 이른 아침 기분 좋게 가장 먼저 출근하여 사무실 문을 열 때 널브러져 있던 냄새나는 음식 쓰레기와 마주치면 정말 기분이 묘했다.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모멸감, 자괴감, 자존감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 등등. 그러나 그럴 때면 나는 늘 마음을 고쳐먹고자 노력했다.


“그래, 이것은 나의 의무라서가 아니라 내가 가장 막내이니까 어른들께 자진해서 해드리는 것이야. 내가 타는 커피가 가장 맛있으니 아량을 베푸는 것이지. 언젠가는 누군가가 나를 위해 커피를 타 주는 날이 반드시 올 거야”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나 실제로 나는 누군가 나를 위해 커피를 타 줄 수 있는 지위까지 올랐지만 공식석상을 제외하고는 내가 마시는 커피를 누군가에게 심부름시키지 않았고 그때도 예전처럼 동료, 선후배 누구에게나 기꺼이 커피를 직접 타서 대접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내가 다시 대학 진학에 뜻을 품고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나의 작은언니 덕분이다. 나와 불과 두 살 터울이던 언니는 일반 여고 졸업 후, 작은 회사에 다니다가 뒤늦게 야간대학에 진학, 일과 학업을 병행하고 있었다. 어느 날 언니는 율산그룹을 그만두고 다시 작은 회사에 다니며 방황하던 내게 대학 진학을 권했다. 학원비와 용돈을 대줄 테니 아예 회사를 퇴직하고 진학 공부에 매달려 보라는 것이었다. 본인은 직장에 다니며 공부해 야간대학에 다니면서 내게는 오직 공부에만 전념하라는 것이다.


그때 언니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언니의 도움에 힘입어 회사를 그만두고 서울역 인근 대입 학원가 종합반에 등록하여 8개월간 오직 대학 진학의 꿈을 이루기 위해 매진했다. 학원의 대다수 재수생들은 3년을 입시공부에 매달리다 낙방, 재도전하는 것이었으므로 모두들 많이 낙심하고 지쳐 있었다. 처음으로 인문계 과목을 제대로 접하며 배우고자 하는 열망에 가득 찬 나와는 수업에 임하는 자세부터 차이가 났다. 상업학교에서 배우는 인문계 과목은 그야말로 주마간산 격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일찍 등원하여 제일 앞자리를 차지했고 수업시간이면 큰 눈을 더욱 크게 뜨고 선생님들의 말씀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집중했다. 8개월 동안 마치 메말랐던 고목이 물을 빨아들이듯 입시에 필요한 지식을 받아들였고 마침내 그 해 입시에서 서울 소재 모 대학교 역사교육학과 진학에 성공하게 되었다.


내가 여고 3학년 때 회계학과 대학생들이 도전하는 부기 1급 자격증을 따고도 회계학과를 마다하고 역사교육학과를 택한 이유는 전적으로 재수 시절 학원에서 만난 국사선생님 덕분이다. 우리는 중, 고등학교에서 수년간 우리나라 역사를 배운다. 그러나 매번 구, 신석기시대, 삼국시대, 고려, 조선 등등 끊임없이 지엽적이고 단편적 지식만을 외우다 18세기 조선 말기쯤 되면 학기를 마치게 된다. 정작 중요한 우리의 현대사는 거의 훑듯이 지나치고 마는 것이다. 여상을 다녔던 내게는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이러한 내게 재수학원에서 만난 김남기 선생님의 강의는 가히 충격으로 다가왔다. 한국사 전체를 꽤 뚫는 통찰력과 진지한 역사의식, 김 선생님은 입시 성적을 올리는 것이 최상의 목표인 학원 선생님 이상의 영향을 내게 주었다. 당초 회계학과에 진학, 고등학교 때부터 꿈꾸어 왔던 공인회계사에 도전하고자 하였는데 역사교육학 전공으로 삶의 방향을 선회하게 되었던 것이다.


대학 합격 소식을 접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작은 선물을 준비하여 서울역 인근에 있던 학원으로 선생님을 찾아간 것이었다. 당시 학원 제일 앞줄에 앉아 강의하시는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하던 내 모습을 선생님이 기억하실 리 만무였지만 그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공직에 근무할 때인 2000년대 초반 한 신문지상에서 김남기 선생님의 인터뷰로 한 지면을 채운 기사를 보게 되었다. 지금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 인근에서 생가 관리와 다산의 삶을 알리는 일을 하고 계신다는 기사였다. 그때의 반가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므로 나는 즉시 신문사를 통해 선생님의 전화번호를 알아내 선생님께 안부인사를 드렸다.


선생님께서도 기억이 날리 없는 나의 전화를 몹시 반가워하시며 한번 찾아오라 말씀하셨지만 그로부터 이십 년이 다 되어가도록 선생님을 찾아뵙지는 못하였다. 혹여 이 글을 통해 김남기 선생님과의 인연이 닿을 수 있다면 꼭 한 번 찾아뵙고 싶다.




천신만고 끝에 대학 진학에 성공하였으나 나의 대학생활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힘겨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이미 경제적 능력을 상실하신 부모님은 물론, 결혼한 오빠도 집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작은언니가 전적으로 가장의 역할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 입학금과 마지막 등록금을 부모님이 해결해 주신 외에는 대부분 대출과 장학금으로 등록금을 마련하였고 용돈은 언니가 도움을 주었지만 넉넉히 지원할 형편이 아니었기에 대학 4년 내내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충당해야만 했다.


당시에는 과외금지 조치로 인해 학생을 가르칠 수 없었으므로 1학년 때는 출판사에 다니시는 형부의 도움으로 편집, 교정 일을 주로 했고 2학년 이후로는 정부에서 지원한 일자리인 교통정리 외에도 각종 설문조사원, 건강식품과 전자제품 판매원 등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사계절 내내 청바지에 티셔츠로 살았고 얼굴에 하얗게 각질이 일어날 정도의 화장기 없는 얼굴로 4년간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영어공부를 위해 당시 유행하던 “마이마이”라는 소형 카세트테이프 재생기를 들으며 다니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지만 전공과목 교재를 구입하기에도 빠듯했던 내 형편에 바랄 수 없는 사치였다. 첫 MT를 제외하곤 모든 학과 행사에 참여한 기억이 없다. 무엇보다 전공이던 역사교육학과에서 필수였던 답사여행 참여도 쉽지 않았다. 졸업 여행도 물론 참여하지 못했다.


대학생활 중 유일했던 기쁨과 희망은 지금의 남편을 만나 사랑하게 된 일이다. 대학 1학년 첫 미팅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힘겨웠던 내게 꿈으로 다가왔던 사람. 나는 당시 모든 상황이 힘겨웠던 만큼 더욱더 남편에게 빠져들었고 우리의 사랑은 대학 졸업 후 결혼을 함으로써 결실을 맺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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