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
촉. 센스. 예민함. 기민함. 배려. 공감능력. 그 사이 어디쯤.
어린 시절, 대기업에 다니는 아빠 덕에 나름 부유하게 지냈다. 컴퓨터가 귀하던 시절에 최신식 컴퓨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늘 집에서는 가곡과 클래식 음악이 끊이지 않았고 공연이나 연주회 영화도 자주 보러 갔다. 초등학생 때는 (‘라떼는’ 국민학교가 아닌 초등학교였다. 나이 계산은 금물!) 집 근처 테니스 선생님이 맘에 든다고 하니 개인 강습도 시켜주셨다.
자랑이 아니라 지금 돌이켜보니 우리 집은 내놓으라 하는 엄청난 부자는 아니었지만 ‘딸바보’였던 아빠 덕에 원하는 것을 모두 누리고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문제는 그 누림을 ‘딸’만 차지했다는 것이었다. 이는 부부 싸움의 발단이자 단골 소재가 되었고 나는 싸움의 원인이라는 죄책감을 키워갔다.
엄마 입장에서는 딸을 버릇없이 키우는 부분도, 아들에겐 너무 냉정하고 엄격한 것도 잘못된 양육태도라 여겼을 것이다.
게다가 아빠는 잦은 출장과 늦은 퇴근으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적었다. 이 부분 또한 부부 사이에 날카롭게 예민한 부분으로 벼려져 갔을 것이다. 아빠가 없는 동안만이라도 남매를 동등하게 대하고 딸에게 모든 것을 가지고 살 수는 없다는 것을 훈육하려던 엄마에게 아빠라는 존재는 오래 집을 비우고 돌아와서는 되돌이표를 그려대는 불협화음 천지 악보 자체라 태워버리고 싶었을 게다.
부부는 열불 나게 싸웠다. 때론 시시할 정도로 금방 꺼졌지만 어쩔 때는 큰 불로 번지는 것 같아 어린 남매는 마음을 졸이고 눈치를 보았다.
그래서일까? 나는 어려서부터 눈치가 아주 빠른 아이였다.
엄마·아빠가 원하는 바를 잘 파악하기 시작했고, 엄마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아빠 대신 엄마에게 전달해 주었고, 아빠에게도 역시 엄마의 퉁명스러운 대답조차 달달한 러브스토리로 둔갑시켜 이야기해 주었다. 그 덕에 둘은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를 몸소 실천하여 우린 그럭저럭 행복해 보이는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나는 그런 유년 시절을 지나 중1이 되자 필리핀으로 홀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그렇게 8년간 내가 모르는, 나에게 전하지 않은 부부만의 예민한 문제들이 쌓였을지도 모르지만 사이가 확실히 벌어져 버린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돌이켜 보니 부부라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아이들을 위해 더 싸움이 커질 수 있지만 참아내고 감내하는 부분이 있어야 하는 사실 바깥일, 타인과의 사회생활보다 더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큰딸이었지만 ‘spoiled brat’ (직역: 썩어빠진 녀석, 의역: 오냐오냐하며 키워서 말을 더럽게도 안 듣는 버릇없는 아이를 일컫는 말)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은 덕에 외동딸 테를 버리지 못한 채 유학과 동시에 아는 목사님 댁에서 하숙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앞서 말했듯 다소 이기적인 성향을 가진 아이라 나의 하숙 생활은 상당한 건방짐으로 시작이 되었다.
목사님의 딸 중 5살 많은 언니에게 어깨를 툭툭 치며 “잘 지내보자!”라고 했으니….
나중에 언니가 말하길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예상치 못한 인사를 해서 적잖이 당황했다고 한다. 어이가 없었겠지. 하하.
그렇게 8년 동안의 유학 생활=하숙 생활을 마치고 나니, 나는 눈치 백 단이되어있었다. 연애를 해도 눈치(촉)가 빨라 남자 친구가 조금만 삐져도 금방 애교로 무마시킬 스킬이 단련되어 있었고, 마음이 식은 것을 조금이라도 눈치채는 날엔 먼저 ‘선빵’을 날려 이별 통보를 했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였다. 사장이 조금이라도 나를 탐탁지 않아하는 눈치면, 금방 퇴사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그런 나의 눈치 빠름은 사실 나에게 득보다는 실이 많았다.
사람이다 보니 실수를 할 수도 있고, 내 부모조차도 나의 모든 면을 사랑해 줄 수 없는데, 나를 모두가 좋아해 주길 바라면서 나의 단점이 들킬 때마다, 또 주변 사람들을 실망시킬 때마다 나는 내 살을 깎아 먹고사는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끊음에 있어 스스로를 너무 피곤하게 만들었다.
6년 전쯤인가, 대학원 동기 언니에게 인간관계에 대해 솔직한 나의 감정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내가 소개해준 친구가 언니와 더 친해지는 게 질투가 난다.’라고 말을 하니,
‘너 인생을 참 피곤하게 산다. 그러면 누가 너랑 친해지고 싶겠니?’라고 짜증 섞인 말을 내게 내뱉었다. 나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고 고민처럼 털어놓은 것인데 ‘너랑은 거리를 두는 편이 낫겠어!’
라는 말투가 상처가 되었다. 비수처럼 가슴에 꽂혀 그 누구와도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
애가 둘이 되고 40대가 된 나는, 이제 불러줘도 먼저 연락을 해줘도 약속을 흔쾌히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내 마음 문이 닫혀서가 아니라 병치레가 잦은 아들 둘 덕에 하도 많은 약속을 파투 내서 이젠 내가 시간적, 마음 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최근에 일이 있어 그 대학원 동기 언니와 단둘이 또 마주하게 되었다. 같이 아는 친구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그 친구랑 친해지고 싶었는데 내가 별로였는지 자꾸 거리를 두더라고요.’라는 이야기에,
‘모든 사람이 널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아.
모든 사람과 친해지려 하지 않아도 돼.
넌 너대로 충분히 매력 있어. 다른 사람 맘에 들게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말해줬다.
참 따뜻한 말이었다.
맞아. 내 지금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주는 사람들도 있잖아.
오 마이 갓, 이걸 40년 만에 깨달은 거야?
아이를 낳고 보니 친구들과 전처럼 연락을 자주 못하는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오랜 공백 끝에 만났을 때, 어색하지 않고 편안한 벗이 있어 고맙다. 가끔 연락이 닿지 않는 이들도 있는데 내게 뭔가 서운한 것이 있어 연락하기 싫어진 걸까 잠시 불안에 빠지는 것도 사실이나 이내 감정 소모를 차단한다.
굳이 확인되지 않은 사실에 길게 걱정할 필요도 없으며 내가 싫어서가 아니라 바쁜 것일 수도 있다.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워킹맘의 에너지란 그렇게 한 곳에 오래 매몰되는 것조차 사치인 게 슬픈 진실이다.
긴 걱정과 온갖 부정적 상상을 하는 것도 에너지가 남아야 하는 거지, 원.
눈치 빠름은 티칭에서는 확실히 장점으로 작용했다.
영어 강사 경력이 쌓일수록 아이들의 성향 파악을 기민하게 했다. 어떤 부분 때문에 영어에 대한 두려움이나 어려움을 느끼는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학생의 미묘한 감정선을 잘 보게 되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부모들에게,
“선생님이 우리 아이를 너무나 잘 파악하고 계시니, 알아서 잘 가르쳐 주실 것이라 믿어요”.
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잠깐의 아르바이트로만 여겼던 영어 강사 일이 재밌어지고, 아이들을 만나는 일이 설레고 기대되었다. Time Flies!
19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재미’와 ‘설렘’ 이 없었다면 절대 지속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요즘도 가끔 ‘자리 깔아도 되겠어!’라는 말을 듣는데 그럴 때면 ‘훗, 아직 죽지 않았어. 지금도 내 촉은 정확해!’라며 확신하기도 속단하기도 한다.
나는 눈치=센스라고 생각하고 40년을 살아왔다.
그래서 눈치 보는 것이 절대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눈치가 센스가 되는 선을 넘어 ‘자책’과 ‘자괴감’으로 발전하게 된다면 마음속의 경보기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래도 어느 정도 슬기로운 인간관계를 유지하려면 어느 정도의 눈치는 있어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Do unto others as you would have them do unto you. (다른 사람들이 너에게 했으면 하는 대로 너도 다른 사람들을 대하라)라는 성경말씀이 있다. 나처럼 한 끗 차이를 모르고 또 눈치만 보는 당신에게 ‘눈치껏’ 하라고 이 글을 남긴다.